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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Nov 15. 2020

용문산 가을 산행

양평행 첫차를 탔다. 다들 절정으로 치닫는 단풍 구경을 놓치기 싫어서일까, 행락차량들로 광주 원주 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하다. 동곤지암 IC에서 98번 도로로 빠져나오니 버스가 막힘 없이 달린다.

추수를 끝낸 텅 빈 들과 단풍이 번지는 산들은 추색이 완연하다. 여주 신북면 양평 강상면을 가로지르고 남한강 위로 놓인 양평대교를 건너 읍내로 들어섰다.

양평역으로 가서 H를 만나 택시로 농다치 고개로 이동했다. 지난해 이른 봄날 농다치 고개에서 말머리봉 청계산 형제봉 부용산을 차례로 지나는 산행을 했었다. 이번엔 반대 방향인 소구니산 유명산 설매재 용문산으로 코스를 잡았다.

밤에 내린 가을비 탓인지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아침 공기가 차다. 지고 가던 신혼살림이 좁은 고개에 부딪혀 긁힐까 봐 "농다 칠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농다치 고개는 시원스레 깔린 아스팔트 위로 차량들이 획 획 쏜살같이 지난다.

소구니산으로 오르는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는 길은 온통 낙엽으로 덮였고, 가지를 앙상히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겨울 몰아칠 칼바람의 전초병 인양 귓바퀴가 시리도록 제법 매섭다.


성성한 활엽수들은 신록의 봄날 가지마다 연초록 잎사귀를 무성히 피워내더니 맹렬한 한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니 미련 없이 그 잎들을 땅으로 돌려보내고 묵묵히 시린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해발 400m가 넘는 농다치에서 완만한 경사의 능선을 한 시간여 오르니 해발 800m 소구니산에 닿았다. 소구니산은 좌측으로 서너 치의 하늘만 보인다는 선어치 고개를 끼고 있고, 우측으로 유명산과 이웃하고 있다.

선어치는 신선이 남한강에서 고기를 낚아 장락으로 가려 이 고개를 넘던 중 고기가 살아나(鮮魚) 소구니산을 넘고 유명산 뒤로 날아가 어비산(魚飛山)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을 가진 고개란다.

왼편의 중미산을 한 번 쳐다보고 앞쪽으로 눈을 들면 저만치에 원만한 능선의 유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명산 정상 언저리에서 용문산 방향 설매재로 직행하기 전에 200여 미터 거리의 너르고 밋밋한 해발 862m 유명산 정상에 올라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원래 말을 길러 대동여지도 등에 마유산(馬遊山)이라 기록된 산, 1973년 국토 자오선 종주를 하던 한 산악단체가 산 이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일행 중 홍일점이던 젊은 여성 이름을 따서 부른 데서 '유명산'이 되었더란다.


출발지 농다치 너머 청계산 능선군이 내리비추는 햇빛에 잘 단련된 근육처럼 아름다운 산줄기를 드러내고 있다. 동편에는 용문산에서 장군봉을 지나 삼각형으로 우뚝 솟아오른 백운봉까지 성벽처럼 높고 견고해 보이는 능선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 활공장은 강한 바람 탓인지 글라이더들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남서쪽 드넓은 완만한 능선에 억새들은 바람에 꺾일 듯 휘청 휘청 군무를 추고 있다.

햇살을 부수며 바람에 흔들흔들 춤추는 억새들에 정신을 빼앗기며 설매재로 가는 임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배너미 고개로도 불리는 설매재에 닿을 무렵 뒤쪽에서 ATV(all-terrain vehicle) 바이크 행렬이 굉음과 함께 매캐한 내음을 뿌리며 고갯마루 옆 대여소로 귀소 하고 있다.

믿기지 않지만 옛날 수해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고도 600m 배너미 고개, 즉 설매재는 영화 '관상'의 촬영지로 눈이 많이 내려도 매화가 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스팔트가 깔린 설매재를 넘어 용문산 줄기로 올라섰다. 용문산 정상까지는 4.1km다. 완만한 숲길 능선을 쉬엄쉬엄 걷다 보면 아스팔트 포장도 종점으로 올라서는데, 솜처럼 흰 구름이 떠 있는 새파란 하늘을 인 용문산 정상부와 군 통신시설이 이마 위로 훤히 모습을 드러낸다.


용문산의 산줄기들은 빗살처럼 겹겹 골을 이루며 뻗어내렸고 멀리 양평 읍과 낮은 산군들 사이로 곡선을 그리며 멀어져 가는 한강이 눈에 들어온다. 배낭을 풀어 컵라면과 과일 등으로 허기를 달래고 에너지를 충전했다.

정상 가섭봉은 까지는 억새군락 능선을 비스듬히 비껴 오르고 바위 너덜길을 지나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오르는 길이 1.7km다. 가섭봉 아래 우측을 휘도는 길 여기저기 흠집을 잔뜩 안고 있는 키 큰 고목 한 그루가 위풍당당하다. 바야흐로 고령화 시대다. 시름시름하는 고목들 대신 당당한 거목들이 우거진 건강한 숲이면 좋겠다.

정상 표지석 옆에 나뭇잎 모양인 듯 폐 모양을 닮은 듯한 특이한 조형물이 서있는 해발 1157m 용문산 가섭봉에 올라섰다. 북쪽이 철책으로 막혀 답답하지만 남쪽과 좌우로 펼쳐진 일망무제 장쾌한 파노라마에 시원스레 가슴이 뚫린다.

당초 용문사로의 하산 길을 시간이 넉넉하다는 판단이 용문봉 쪽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섭봉에서 철책을 따라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두어 번 철조망을 통과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날카로운 바위를 내려서서 숲길을 지났다.

발에 차이는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평이한 숲길을 지나면 규암 투성이 오르막 바위 능선이 본격적으로 우뚝 우뚝 암봉으로 막아서며 강단과 체력을 시험하려 든다.


능선 아래 솟은 흰색 바위를 가리키며 '미켈란젤로의 다윗 像'이라 H가 외치면 그 옆 장대한 바위를 가리키며 '모세像이 저기에'라고 화답하며 바위를 타고 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상인 듯 보이던 암봉 몇 개를 지나고 나서야 용문사가 있는 계곡 쪽으로 천애 절벽을 드러내며 해발 947m 용문봉이 나타난다.

당초 생각보다 길고 험한 능선이 넉넉하리라던 시간을 잡아먹으며 하산 길을 보챈다. 용문사 아래쪽 멀직히 자리한 버스정류장이 있는 관광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큰 산에는 줄기나 골짜기에 여러 가닥이 있어 결을 잘 골라야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쉽고 빨리 도달할 수 있다.

거대한 암봉들이 막아선 가파른 내리막 능선을 지루하게 헤쳐 빠져나오면 급경사의 참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만산낙엽'이랄까, 떨어진 참나무 잎으로 온통 수북이 덮인 능선을 급전직하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용문사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난 길로 올라서서 특유의 은행 열매 냄새를 맡으며 산사에서 내려오는 행락객들 틈에 섞여 일주문을 나섰다. 관광지 마을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여기저기 색색 물든 단풍나무가 늦은 오후 짧은 햇빛을 받으며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태양은 용문산 줄기 너머로 숨었고 더디게 들어온 용문터미널행 버스는 승객을 가득 싣고 가을에 깊이 취해 있는 용문산의 품을 천천히 벗어났다.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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