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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Nov 14. 2020

산죽의 바다를 걷다

한강기맥, 운두령에서 장곡현까지

한강기맥은 오대산 두로봉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해서 계방산, 발교산, 용문산, 청계산 등을 거쳐 양평군 양수리 두물머리까지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며 이어지는 167km 산줄기다.

입동이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절기이지만 날씨는 오히려 푸근하다. 청량리역에서 KTX를 타고 진부로 향했다. 한 번 발을 들여놓은 한강기맥, 그 산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종주하겠다는 친구 M의 바람을 이어갈 요량이다.

이 년 전 매주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 타던 고속열차를 오랜만에 탄다. 어릴 적 기차 여행의 낭만과 감흥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덜컹대는 소리에 마음이 덩달이 덩실댄다. 양평, 만종, 둔내, 평창을 거쳐 도착한 진부역에서 내렸다.

각자 다른 호차에서 내린 친구들과 만나 택시를 타고 운두령으로 향했다. 길 옆으로 스쳐 가는 능선 위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낙엽송 군락이 장관이다. 눈에 익은 나지막한 이승복 기념관도 스쳐 지난다. 고도를 높이며 구불구불 이어지던 고갯길은 해발 1089미터 고갯마루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가팔라진다.


운두령엔 지난 한글날의 운두령~오대산 비로봉 산행 때에 이어 금년 들어 두 번째로 찾아온 것이다. 해 뜨기 전 새벽에 도착했던 그때와 달리 고개를 넘는 아스팔트, 풍력발전기, 휴게소, 계방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등이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운두령을 출발해서 한강기맥을 따라 서진한다. 아침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수도권에서 삼백 리나 떨어진 산중 외진 고개에서 당일치기 산행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새벽잠을 아낀 부지런함에 더해 순전히 KTX 등 교통수단의 이기 덕분이다.

완만한 능선으로 오르니 참나무 군락은 잎을 모두 떨구어 성긴 숲이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고도 1000미터가 넘는 능선과 산자락을 산죽이 뒤덮었다. 산죽 군락은 갈색 낙엽으로 뒤덮인 산에 푸른빛을 수놓고 있다. 찬바람이 한 번씩 몰아치다 그치고 그쳤다가 다시 몰아치곤 한다. 그 바람에 산죽들도 일제히 잎을 떨며 한 몸처럼 일렁인다.

찾는 산객이 적은 곳이라 그런지 산길엔 낙엽이 두껍게 쌓였고 잡목 가지가 어지러이 앞을 가로막곤 한다. 시야가 좋지 않은 날씨라 윙윙대는 바람 소리와 발 밑에 낙엽 채이는 소리만 산객과 함께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적당히 섞인 혼효림이 대부분인 다른 산들과는 달리 들머리 운두령에서 장곡현 날머리까지 한강기맥 능선 길은 온통 참나무뿐이다. 그래서인지 헐벗은 나목들 사이에 은빛 옷을 두른 자작나무가 특별해 보이고 참나무 고목 가지 꼭대기에 꽃처럼 자라난 겨우살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움푹 파인 보래령 고개로 내려서니 첫 이정표가 산객을 반긴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만에 운두령에서 6km를 걸어왔다. 보래봉까지는 약 1.3km 된비알이다. 발목이 뒤로 젖혀 아킬레스건이 팽팽하게 당긴다. 몸에서 가장 크고 강력하다는 이 힘줄도 된비알을 버거워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정표 기둥에 '한강기맥 보래봉 1326m'이라 적힌 코팅한 A4용지가 달린 보래봉을 지난다. 좌측에 솟아 있는 해발 1324미터 회령봉과의 분깃점에서 우측으로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기맥으로 길을 이어간다. 설치한 목적과 연유를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를 지나고 나뭇가지에 걸린 코팅한 종이에 '한강기맥 자운치 995m'라 적힌 안부도 지나간다.

왼편에서 큰 군함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회령봉 능선을 올려다보며 기맥은 느슨한 능선을 따라 천천히 비탈을 오른다. 비탈은 두세 차례 느슨하다가 가팔라지기를 반복하며 가다 서다 산객의 발길을 더디게 한다.


산죽이 무릎까지 덮는 능선 길을 따라 아무런 표식도 없는 1212봉을 지나 흥정산 쪽을 비껴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발령 쪽으로 향한다. 바람이 호기롭게 몰아치며 헐벗은 참나무 가지를 현(絃) 삼아 웅웅거린다.

오후 세 시경 흥정계곡과 자운계곡을 남북으로 거느린 해발 1013미터 불발현에 도착했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능선이 수 십리 이어지는 산악지역에 전국 여느 산과 달리 작은 사찰 하나도 없으니 미명을 밝힐 불도량(佛道場)을 염원하는 이름일까? 삼한시대 신라군에 쫓기던 태기왕이 날이 저물자 불을 밝히라 했다는 전설은 불발현(佛發峴)이라는 지명을 설명해 주기엔 어딘지 모자라고 엉성해 보인다.

불발현에서 임도로 내려서자고 아우성치는 마음을 다독이며 청량봉과 장곡현으로 향했다. 다음에 이어갈 코스를 생각해서 2km쯤 더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해발 1052미터 청량봉도 조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철제 정상비와 안내도가 자리하고 있고 그 옆 나뭇가지에는 여러 산악회에서 달아 놓은 리본이 수북하다.

기맥은 청량봉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휙 틀며 장곡현으로 고도를 낮추어 간다. 더욱 무성하고 난삽한 산죽과 잡목을 헤치며 나아가는 길은 마치 푸른 바다를 헤엄쳐 가는 기분이다. 왼쪽 아래로 불발현에서 내려오는 임도가 눈에 들어오자 지친 몸에 생기가 되살아나는 듯하다. 장곡현에 도착하며 기맥을 탈출해서 6km여 임도를 따라 흥정리로 내려섰다. 짧은 해는 어느덧 능선 너머로 숨었다.


콜 한 지 20여 분만에 도착한 택시로 평창역으로 향했다. 평창역까지 20여 km를 달리는 동안 기사분은 흥정계곡 자랑, 진부 봉평 대화 등 3개 면 일부를 끌어다가 용평면을 신설했다는 얘기, 서울에 가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던 에피소드 등을 산객에게 풀어놓는다. 자신의 고장을 찾는 타지 사람들에게 평창을 알리는 이분만 한 홍보대사가 어디 있을까 싶다.

처음 보는 손님과도 한 번 말을 터면 아무것에도 구애됨 없이 세상사 온갖 잡다한 얘깃거리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택시 드라이버라는 직업이 일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창역에 도착했다. 진부역의 수호랑 반다비 등 조형물과 함께 평창역도 크고 번듯한 역사가  올림픽을 개최한 고장임을 상기시켜 준다. 평창역엔 역사 하나만 우뚝 자리해 있고 주변에는 아무런 건물이나 시설도 없어 뜨끈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씩 하려던 기대를 거둘 수밖에 도리가 없다. 궁전처럼 너른 역사 2층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 서너 명뿐 한적하기 그지없다.

대합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편의점에서 산 컵 라면과 모주, 배낭 속에 남아 있던 떡, 고구마, 과일 등 음식을 함께 늘어놓았다. 편의점 아가씨가 찐만두와 크림빵 등을 창문 너머로 건네주는 호의를 베푼다. 술 좋아하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어머니가 메밀로 빚었다는 이 지역 특산 모주(母酒), 쓴 소주나 달달하고 투박한  막걸리와는 달리 적당한 무게감에 은은한 향이 더해져 독특하다. 그 맛은 이름에 담긴 의미에 더해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듯하다.

'해발 700m 지점이 가장 행복한 고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평창의 브랜드 'HAPPY 700'처럼, 이렇듯 우리는 줄곧 고도 1,000미터가 넘는 여러 능선과 고개, 그리고 봉을 힘겹게 오르내리고, 그 끝에 짧지만 헛헛한 듯 풍만한 행복감에 만족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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