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인산 Sep 10. 2020

노인봉, 자연에 빠져 들다

무위자연, 노인봉과 소금강

뜨거운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태양은 맹산 위 한 뼘 높이로 안개 낀 하늘에 떠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시달린 탓에 제12호 태풍 '종다리'가 비를 몰고 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기상예보가 있었다.


야탑 전철역 빵집에서 찹쌀떡을 사는데 마수걸이 손님이라서일까, 덤으로 빵 두 개를 얹어서 봉지에 담아 준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찹쌀떡과 덤으로 받은 빵, 값어치로는 주객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복정역으로 배낭을 둘러맨 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사당역 역삼역을 거쳐 이곳 복정역에서 차례로 등산객들을 태울 산행 버스를 기다린다. 지리산 등 남쪽 지역으로 향하는 산행 버스는 복정역 대신에 경부고속도로변 죽전 버스정류장을 거쳐 갈 것이다.

'반더룽(Wanderung)', 도보여행 나들이 소풍 산책 등의 의미를 가진 독일어 여성명사로 이번 산행을 준비한 산악회 이름이다. 예정된 시각에 도착한 버스는 미리 예약한 승객을 태우고 07:15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정체가 심하던 길은 초월 곤지암 등 터널을 지나면서 뚫렸다 막혔다를 반복한다. 도로변 노란 달맞이꽃이 목을 길게 빼고 차량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도로변 산들이 연무처럼 뿌연 안개에 싸여있고 버스는 영동고속도로 새말을 지나면서 제 속도를 찾았다.

피서객들의 중간 기착지 영동고속도로 하행 횡성휴게소는 시원한 차림새의 남녀노소 피서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버스는 평창올림픽 조형물이 맞이하는 진부 IC로 내려서서 6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오대산 국립공원 동대산과 노인봉 줄기가 낮은 곳으로 수렴하며 만나는 고개, 진고개가 가까워질수록 고도는 높아지고 안개는 짙어진다. 해발 700m 지점을 지나자 안개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비가 되어 버스 유리창에 맺힌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에 힘겨워하던 버스가 해발 960m 고갯마루에 산객들을 내려놓았다.


산객들은 비가 흩뿌리고 안개에 묻힌 진고개 휴게소에서 비옷이나 우산을 꺼내고 신발끈을 조이는 등 산행 채비를 하고 나무계단 들머리로 들어섰다. 우산이나 비옷을 준비하지 못한 산객들도 잠시 주저하다 발을 내딛는다.


배낭을 꾸리며 비옷을 챙겨 와서 다행이다. 산행 중에는 예견되거나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복병은 추위나 더위 악천후 등 기후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나쁜 컨디션일 수도 있다. 잠깐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준비도 게을리 않는다면 그런 복병들도 문제 될 것이 없을 터이다.


들머리에서 비탈길로 들어서기 전까지 평탄한 길 오른편은 너른 평지로 야생화가 허리 높이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풀숲이다. 그 풀숲은 안갯속에 묻혀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노인봉 가는 길 가장 힘겨운 초반 가파르고 긴 계단길을 올라섰다. 해발 1200여 미터 지점까지의 2km 남짓 비탈길에 이어 걷기 편한 평탄한 능선길이 나온다. 비에 젖었는지 땀에 젖었는지 온 몸은 이미 흥건하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능선길은 도심 삼복더위가 딴 세상 얘기다. 여전히 비는 흩뿌리고 정상 쪽에서 반바지에 셔츠 차림 학생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뛰어 스쳐 지난다. 어디 선수냐는 물음에 '진고요'라 대답한다. 진고개와 노인봉을 오가며 땀을 아끼지 않는 진부고등학교 학생들이 땀의 대가를 넉넉히 얻기를 바라본다.


노인봉까지 2km여 평탄한 능선길, 두두두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터키행진곡처럼 경쾌하다가 바람과 함께 후두두둑- 휘모리장단처럼 급하게 바뀌기도 한다.


길 옆에 죽어서 뼈처럼 마른 줄기와 가지를 앙상히 드러낸 노간주나무가 눈길을 끈다. 살아 푸른 잎을 입고 있을 땐 그저 평범한 한 그루 나무였을 터인데, 유명을 달리한 고 노회찬 의원처럼 사람도 가고 난 후에 뒤늦게 그 진가가 돋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인봉 아래 삼거리에서 양 옆으로 머리 높이 활엽 관목이 빽빽이 들어선 좁은 길을 200m쯤 오르면 거대한 바위들로 덮인 노인봉 정상이 산객을 맞는다.


남동쪽 소황병산 선자령으로 이어지며 평창과 강릉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338m 노인봉(老人峯)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처럼 운해에 둘러싸였다. 안개를 발아래 굽어보는 봉우리 위로 햇볕이 비치지만 계곡과 능선을 타고 오는 바람 때문인지 선선해서 산객들은 좀처럼 발을 옮길 줄 모른다.


귀여운 다람쥐들이 정상 바위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산객들에 다가온다. 열매 맺는 가을이 오기 전 이맘때가 다람쥐에겐 넘기기 힘든 시기일 것이다. 두려움이나 야성도 생존이라는 절박한 명제보다 앞설 수는 없나 보다.


노인봉을 뒤로하고 청학동 소금강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계곡이 모습을 드러내는 낙영 폭포까지 1.5㎞는 계단이 많은 급경사 구간이다. 물기를 머금은 바위들이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추상화인 듯 풍경화인 듯하다. 그야말로 바위는 캔버스요 이끼는 천연색 물감이다.


가파른 계단길 끝 저녁녘처럼 어스름한 계곡에 내리치는 물소리와 함께 낙영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영 폭포 긴 물줄기가 너른 바위 절벽을 타고 그림처럼 흘러내리고 머리에 쓴 모자챙에서는 땀줄기가 뚝뚝 떨어진다.


소금강 계곡물은 진고개에서 발원하여 20km 여를 달려 주문진 아래 동해로 흘러가는 연곡천, 즉 무릉계(武陵溪)에 안겨 든다. 낙영 폭포를 비롯해서 그 아래로 연이어 나오는 수많은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나타난다. 당장이라도 신발과 옷을 벗어젖히고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산은 어디에 저 많은 물을 품었다가 계곡으로 흘려보내는지 신기롭다.


너른 소에 손을 담그고 세수를 하며 아쉬워 일어설 줄 모르는 H를 채근해서 길을 다잡았다. 광폭포와 삼폭포, 집채만 한 너럭바위 뒤로 우뚝 선 백운대와 선녀탕, 만물상과 귀면암, 천마봉 쪽 계곡에서 소금강 계곡으로 떨어지는 구룡폭포, 마의태자 전설과 율곡의 얘기를 간직한 식당암, 십자소 등 선경이 연이어 나타난다.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작은 금강산, '小金剛'이라는 글씨가 금강사 앞 영춘대 바위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소금강의 풍광이 이럴진대 금강산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신선들이 유유자적 노닐듯 선경 같은 소금강 계곡을 빠져나오면서 소를 타고 함곡관 밖으로 종적을 감췄다는 노자가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5시경 버스에 올라 무릉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진고개를 넘어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영동고속도로 상행선은 교통이 원활하고 비가 그친 하늘에 구름이 동화처럼 그림을 그려 놓았다. 18-07

매거진의 이전글 남덕유산의 눈 잔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