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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11. 2020

월악산 영봉과 달

월악산 산행

네 해 전 늦가을 찾았던 월악산으로 향했다. 그때 수안보에서 일박이일 워크숍을 끝내고 차를 몰아 잠시 들른 만수휴게소, "반나절로 다녀오기 어렵다."는 그 휴게소 노부부의 말에 따라 월악산 주봉 대신 만수봉에 올랐었다.


휴게소 입구 돌하르방, 소박하고 구수했던 산채비빔밥, 계곡 작은 폭포에 맺힌 고드름, 희끗희끗 초설이 깔린 등산로, 푸른 산죽,... 시간은 흘렀어도 그때 산행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함께 산행을 하기로 한 친구가 수고롭게 차를 몰아 우리 집 근처로 왔다. 시간 반여 만에 괴산 IC를 빠져나와 충주호 가장자리를 따라 난 36번 도로를 달려 제천 덕산면 수산리에 도착했다.

월악 동쪽을 휘돌아 흐르는 광천은 월악 서쪽의 달천과 만나 충주호로 흘러든다. 광천 위에 놓인 수산교를 건너 수산리에 차를 세웠다. 수산리에서 보덕암 옆 월악산 하봉으로 올라 중봉과 영봉을 거쳐 덕주사 마애불 쪽으로 내려와 덕주사에서 산행을 맺는 코스를 잡았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편 앞쪽으로 월악산 세 봉우리가 긴 능선 중간에 도드라져 올라 뿔처럼 오똑 솟아 있다. 수산리 뒤쪽 월악산 자락이 치맛자락처럼 넓은 능선을 펼쳤다. 완만한 능선을 갈아 일군 밭에는 머지않아 채소가 싹을 틔우고 과수원 나무들은 꽃을 피울 것이다.

밭 사이로 난 비탈진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하봉에서 내려온 말목처럼 가파른 줄기를 살짝 비켜 보덕암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천 년 전 신라의 옛 절터에 80년대 중반 입산했다는 현 주지스님이 대웅전과 보덕암 등을 세웠단다. 독경 대신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오는 보덕암에서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짧은 담소 뒤에 돌아서는데 스님은 서둘러 암자에서 사과 두 알을 꺼내 와서 산객에게 내밀며 좋은 산행을 기원해 준다.

보덕암 옆 들머리에서 하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통통통통' 밭에서 들리는 발동기 소리, '빠-빠빠 빠빠빠빠- 빠-바-(그리운 남쪽 하늘 아래~)' 보덕암 스님의 색소폰 소리가 서로 섞여서 능선을 타고 산객의 등 뒤를 쫓아온다.


국립공원 월악은 악산(岳山)의 면모를 여실이 보여 준다. 수직 경사 계단 옆으로 절벽이 솟았고, 바위들은 수 만 년 비와 비람에 시달린 듯 벌집처럼 층층이 구멍이 패였다. 밤새 추위에 떨었을 산길 바닥은 닭살 것처럼 숭숭 융기해 얼었고 바위 절벽엔 고드름이 달렸다. 깎아지른 암벽 옆으로 휘돌아 난 계단은 아찔하다.

산새들은 봄 햇살에 절로 신이 나는지 제각기 목소리를 높여 재잘대고, 바람과 눈에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노송 가지들은 꺾이고 부러져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하봉 언저리에 가까워지면서 뒤 돌아보면 성긴 나무 가지 사이로 충주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우회하여 지나쳤다던 하봉, 그 험한 암벽 위로 난간이 있는 철재 계단이 놓였다. 봉우리 위로 놓인 계단 끝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강렬하다. 하봉엔 너른 데크 외에 표지석이 없다. 중봉과 더불어 툭 인 사방을 굽어보며 우뚝 솟아 있지만 높이에서 영봉에 조금 못 미쳐 자기 색깔 없는 무채색처럼 일반명사로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하봉에서 중봉까지는 지척이지만 오금이 저리도록 아찔한 구름다리와 철 계단을 지나야 만 한다. 중봉 아래 두 개의 절벽 틈새 위에 거대한 바위가 걸린 돌문이 절경이다. 그 위로 계단길이 놓여 지나기는 한결 수월한데 절묘한 모양새는 계단에 가려 퇴색되었다.

좁은 능선 마루에 놓인 철계단 난간 밖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눈앞 보이는 사물에 쉬이 혹하는 마음은 혹여 계단 바닥이 꺼질세라 절벽 반대쪽 난간을 붙잡고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중봉과 영봉 사이 깊게 패인 골을 지나는 구간은 만만찮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영봉 북쪽 사면엔 녹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낮 햇볕이 버거웠던지 소나무는 솔잎마다 이고 있던 상고대 조각을 흩날리는 눈처럼 머리 위로 떨군다.

해발 1097미터 월악의 맏형 영봉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힘겹다. 눈을 질끈 감고 사다리처럼 암벽 위로 놓인 철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먼저 오른 산객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고 정상이 너른 데크를 허락했다. 영봉 사방으로 펼쳐진 모습은 말 그대로 일망무애,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남쪽으로 멀리 북바위산 박쥐봉 주흘산 등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 지나온 중봉 하봉 너머로 충주호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둥근달처럼 동그란 구형 바위 돌에 새겨진 '영봉' 글자가 보름달처럼 옹골차다. 그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남기려고 여러 산객들이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산객들은 아랑곳 않고 표지석 좌우로 오가며 온갖 포즈를 취하며 셔트를 눌러대는 중년 부부 한 쌍은 끌끌 혀를 차게 만든다.

한동안 사방을 조망했다. 이마와 등에 스며 나온 땀이 식을 무렵 덕주사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내려가는 길은 지나온 길보다 더 가파르고 계단은 쑥쑥 고도를 낮추며 끝없이 아래쪽으로 이어진다. 힘겹게 올라오는 등산객들 모습에 '산행코스 잘 잡았구나'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한참 만에 계단 길을 벗어나 영봉 바위 절벽 아래를 우측으로 휘돌아 절벽 멀찍이 능선에 서면 150여 미터 거대한 암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산길 복슬강아지 꼬리처럼 얼굴에 살랑대며 와 닿는 미풍이 좋다.

월악산 마애봉이 능선 아래 넉넉하고 아늑한 터를 내어 준 곳에 옛 덕주사 터가 있다. 6.25 때 불탔다는 그 터엔 보물 제406호 마애불이 새로 들어선 극락보전 삼성각 요사채와 함께 천 년의 세월을 지키고 서있다. 신라 마지막 태자 마의와 그의 누이 덕주 공주의 전설이 지나는 산객을 그냥 보내기 아쉬운지 한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는 월악산은 가슴 깊숙이 많은 얘기를 품고 있을 듯하다. 망국의 태자와 공주 오누이는 외진 이곳 월악산 자락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자지 않으면 꿈이 없을 테지만 사는 것이 꿈이라면 어떻게 꿈을 깰까"


산행 들머리 보덕암의 스님은 암자 벽면에 써 붙인 화두를 풀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화두 보따리를 끄르고 있을까?


마애불 옆 바위 아래 깊숙한 곳에서 넉넉히 흘러나오는 약수를 떠서 한 모금 마시고 내려가는 길을 잡았다. 약수터에서 발원한 듯 졸졸 가늘게 흐르던 계곡물은 마방골에서 내려온 계곡과 합류한다. 최근에 새로이 들어선 덕주사에 닿을 즈음 물소리가 우렁차고 수량이 많은 큰 계곡이 되어 달천으로 흘러든다.


너른 터에 대웅전 관음전 약사전 산신각 등 법당들이 널찍한 간격을 두고 들어선 덕주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중천을 막 지난해는 따사롭게 미소 짓고 산사를 찾은 사람들 모습은 여유롭다.


덕주산성의 남문 덕주루(德周樓), 신라 때 제사를 올리던 수경대(水鏡臺), 송계 팔경의 하나인 학소대(鶴巢臺) 등을 차례로 지나며 월악의 품을 빠져나왔다. 뒤로 월악은 점점 멀어지는데 보름달이 걸린 영봉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은 좀체 사그라들지를 않는다.


몇 해 전 만수계곡 초입에서 만났던 여고생이 쓴 시 한 편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고생은 벌써 졸업을 했을 텐데, 시인이 되었을까? 어느 하늘에 뜬 달을 보고 있을까? 18-03


차근차근 한 걸음씩 가라는 듯
울퉁불퉁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고

멀리멀리 내다보며 가라는 듯
나무들이 하늘을 받쳐주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아쉬운 듯
바람소리 울음처럼 울려 퍼지고

그래서 오늘 밤도 월악산 영봉에는
달이 쉬엄쉬엄 가나보다.

- <월악산의 달>, 충주여고 2학년 한윤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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