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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08. 2020

남덕유산의 눈 잔치

겨울도 이제 끝자락이다. 문득 덕유산이 떠올랐다. 올 겨울에는 눈 다운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 산행의 묘미를 맛볼 수 없었던 터였다. 하늘이 아쉬워하는 내 마음을 헤아린 걸까? 산행을 하루 앞둔 어제 올 들어 처음으로 눈 다운 눈이 내렸다.


덕이 많은 너그러운 산이라 해서 이름 붙였다는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 그 최고봉인 해발 1,614미터 향적봉이 남서쪽으로 연봉들을 거느리며 뻗어 내리다가 능선 막바지에 벌떡 솟구쳐 놓은 봉우리가 해발 1,507미터 남덕유산이다.

이른 아침 양재 전철역사 안팎은 배낭을 짊어진 남녀노소 산객들로 붐빈다. 접근성이 좋고 고속도로 진입로도 가까운 교통의 요지인지라 전국 각지 이름난 산으로 산객을 싣고 떠날 산행 버스들의 출발지가 그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7시경 산행 버스가 남덕유산 남동쪽 함양의 영각사를 향해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죽암휴게소를 지날 무렵 멈추었다. 앞 좌석에 나란히 앉은 년배의 산행 팀이 나누는 산행코스 얘기에서 들뜬 마음이 전해온다. 마음에 이는 설렘은 나이와는 무관한가 보다.

버스가 통영 대전 고속도로 서상 IC로 내려서 함양군 서상면으로 들어섰다. 멈추었던 눈은 더 굵은 눈발로 바람을 타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하늘거리며 춤춘다.

구불구불 '육십령로'를 따라 육십령에 일단의 산객을 내려준 버스는 핸들을 돌려 영각사로 향한다. 산적이 많이 출몰해서 일행이 60명은 돼야 넘을 수 있었다는 전설을 가진 고개, 육십령은 60개 굽이길이 있다는 말처럼 구불구불 험하다. 차창에 잔뜩 서린 김이 시야를 가려 답답하고 산행 들머리 부근 주차장에 도착할 즈음 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영각사 아래 산행 들머리는 해발 700미터가 넘으니 오늘 올라야 할 고도는 800미터 정도이다. 876년 신라 헌강왕 때 심광(深光)이 창건했다는 영각사를 아쉬운 마음으로 비껴 지났다. 산행 초입 눈을 머리에 인 산죽이 계곡길 옆으로 도열하듯 무리 지어 흩날리는 눈을 맞고 서있다.

가는 눈이 장난을 걸듯 얼굴에 부딪히며 간지럽히고 능선 위에서는 바람소리가 씽씽 매섭게 들려온다. 눈 내리는 동양화의 선경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계곡과 함께 나란히 가던 완만한 길이 해발 1,001 표지석을 지나고 나서부터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눌러쓴 모자를 비집고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을 손으로 간간히 훔쳤다.


너덜길 바위들도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후다닥 쏟아져 내리는 비와 달리 지저분하거나 더러운 것들을 잠시나마 덮어주는 눈, 말없이 흠을 감싸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듯 사람들은 그런 눈을 좋아하나 보다. 눈이 녹으면 더 추한 모습을 되돌려 주기도 하지만...


긴 계단길 해발 1,200미터 지점에서 바람은 거세지고 숲을 이룬 나무들은 가지마다 온통 상고대로 덮여 장관을 연출한다. 남덕유산 주봉 동쪽의 동봉으로 이어진 능선 마루에 올라섰다. 배꼽시계에 굴복한 산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허기를 달래고 있다.


평탄한 능선길은 잠시뿐이고 또다시 시작된 바위로 덮인 가파른 오르막 길을 오르면 앞쪽으로 남덕유산 주봉, 좌우로 서봉과 동봉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잠시 멈춰 서서 둘러보면 전후좌우로 펼쳐진 눈 세상이 경이롭다. 흰 눈을 뒤집어쓴 부드러운 능선의 동봉은 새끼 북극곰의 털처럼 티 없이 희다. 나무에 내려앉았던 눈이 아래쪽 계곡에서 돌개바람을 타고 연기 기둥처럼 솟구치고, 옅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머리 위로는 언뜻언뜻 청아한 빛 하늘이 드러나고, 눈앞 허공에는 바람에 날려 부서진 눈이 다이아몬드 가루를 흩뿌린 듯 햇빛에 반짝인다.


주봉으로 가는 V자로 패인 경사길에 놓인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한발 한발 오르면 홀연히 해발 1,507미터 남덕유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 표지석 앞에는 황홀한 산행의 소중한 추억을 한 장의 인증 숏에 담으려는 산객들이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우리 일행도 다른 산객에게 부탁해서 훗날 분명 손에 꼽을 만한 '인생 사진'이 될 장면 하나를 스마트 폰에 담았다.


정상을 뒤로하고 월성재로 방향을 잡았다. 동쪽으로 난 가파른 그 내리막 길은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어 아찔하다.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도 찧어가며 한참만에 월성재로 내려섰다.


같은 버스를 탔던 산객 절반 이상은 육십령이나 영각사 쪽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남덕유산을 경유하여 월성재와 삿갓봉을 지나고 삿갓재 대피소에서 일박 후 무룡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따라 향적봉까지 산행을 이어갈 것이다.


월성재에서 삿갓봉으로 이어지는 길을 외면하고 황점으로 가는 하산 길로 접어드는 마음에 진한 아쉬움이 인다. 간간이 왼쪽 위로 눈을 들어 삿갓봉 쪽을 쳐다보며 발길을 채근했다.


해발 1,000미터쯤에서 다시 산죽 군락이 나타나고 눈은 오가는 산객들 발길에 녹아 한결 걷기가 편하다. 해발 900 지점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쭉쭉 뻗은 낙엽송이 보기에 좋은 평탄한 숲길이다. 낙엽송 줄기 사이로 내리비치는 따사로운 햇살이 반갑다.


덕유산 준봉들 아래 포근히 안겨 있는 거창군 황점마을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눈 산행을 고대하며 나섰던 길, 어제에 이어 상서로운 눈이 내렸고, 더구나 남덕유산은 온통 눈으로 단장을 하고 흩날리는 눈으로 맞이해준 산행, 그야말로 하늘이 돕고 신이 도운 '천우신조'의 산행이랄 수밖에...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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