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악산 안개구름 위를 걷다

by 꿈꾸는 시시포스

에제 밤에는 비가 내렸다. 토요일이지만 열흘 긴 추석 연휴 기간이라 도로는 한산하다. 평소 궁금해하던 경기 오악의 하나인 운악산으로 차를 몰았다. 북한강의 지류인 조종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7시 반경 운악리 들머리에 도착했다.

운악산은 포천과 가평의 경계에 놓여 양쪽에서 각각 오르는 코스가 있다. 이른 아침 나 홀로 산행자 몇몇이 서둘러 들머리인 현등사로 난 경사진 길에 서 있는 '운악산 현등사' 한글 현판의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운악산 정상은 좌청룡 우백호로 불리는 긴 능선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일주문에서 현등사로 난 오르막길을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는 청룡에 해당하는 능선이다.

초입부터 등로는 가장자리 양 옆에 나무 말뚝을 박고 한 뼘 굵기의 통나무를 가로질러 놓은 계단길이다. 청룡 능선은 온통 안개에 덮여 시야가 멀리 가지 못하고 몸은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땀에 젖기 시작한다. 가을의 숲은 년년이 떨어져 미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 위로 또 새로이 낙엽이 쌓일 채비를 하고 있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온갖 감기로 고생했었다. 항체가 없어 매년 걸린다는 감기처럼 비탈진 산행길도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매번 오를 때마다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안개에 갇힌 산은 등로만 여우꼬리처럼 살짝 드러내 놓고 몸통은 감췄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안개도 제 무게가 버거운지 높이 오르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능선 아래로 깔리고 조금씩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앞을 가로막아선 선녀와 총각 전설이 서린 눈썹바위를 우회하여 그 위 능선으로 올라섰다. 산 아래 세상은 온통 구름의 바다에 잠겼다. 멀리 높고 낮은 산들은 다도해 위의 섬들처럼 머리만 빼꼼히 내놓았다. 바람과 씨름하며 햇빛과 어우러져 시시각각 제 모습이 변하는 운해의 장관을 한참 동안 감탄하며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토봉을 우회하여 능선에 올라서면 병풍바위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조망대가 나온다.

신라 법흥왕 때인 540년 인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져와 현등사에 봉안했다는 마라가미 스님이 오르려다 내쳐졌다는 병풍바위. 바위 하나가 온전히 봉우리 하나를 이룬 천 길 바위 절벽 봉우리들이 톱니처럼 서로 의지하며 솟아 있다. 정상인 동봉으로 가는 가파른 바윗길 곳곳에는 철사다리가 놓였다. 그 위에서 뒤돌아 보면 산맥들은 운해에 쌓여 있고 바로 아래 능선에서 솟아오른 미륵바위는 서로 키재기라도 하듯 우뚝하다.

운악 팔경의 하나로 동봉 바로 아래 위치한 망경대는 거대한 암봉이다. 그 이름처럼 사방이 툭 트여 운악산 최고의 조망처로 부족함이 없다. 바위에 ㄷ자형 철심을 박아 낸 길을 올라서면 평평하고 너른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937.5미터 동봉엔 정상 표지석이 둘이다. 가평군의 '운악산 비로봉' 포천시의 '운악산'. 온전히 포천에 속해 있는 해발 935.5미터 서봉은 동봉에서 5분 거리로 산책길처럼 평탄한 숲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봉 정상 표지석은 '운악산' 하나다.



동봉으로 되돌아와서 하판리 현등사 쪽 하산길로 접어들면 호젓한 단풍 흙길이 이어진다. 남근석 조망대를 지나면 백호 능선과 현등사로 갈라지는 절고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르는 길과 정상에서 언뜻언뜻 모습을 보인 백호 능선은 여러 봉우리가 어우러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백호 능선 제1봉에 올랐다가 다시 절고개로 내려와 현등사로 향했다.

현등사로의 하산길은 가파른 바위 너덜길이 1.1km 이어진다. 정오를 넘긴 시각인데 여러 산객들이 현등사 쪽에서 꼬리를 물고 올라온다. 운악 팔경 중 제4경 코끼리 바위가 오르내리는 산객들을 잠시 쉬어가라는 듯 길게 코를 늘어뜨리고 눈길을 잡는다. 너덜 바윗길이 지루해질 즈음 현등사에 닿았다. 산에서 내려와 사찰 뒤로 들어선 터라 조선 태조 때 현등사를 중창했다는 함허 대사 사리탑이 먼저 모습을 보인다.

현등사(懸燈寺)는 운악산 아래 좌우로 늘어선 청룡과 백호 능선이 감싸 안은 해발 500미터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는데 극락보전 지장전 보광전 관음전 영산보전 만월보전 삼성각 적멸보궁 등의 여러 전각과 1470년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경내에 들어서있다.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재창건하고 땅기운을 진정시키려 세웠다는 7층 지진탑(地鎭塔)은 상단 3층만 남아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로 난 108 계단을 내려서며 불이문(不二門)을 나섰다.

계곡을 끼고 일주문으로 난 긴 길에는 현등사 쪽으로 향하는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안개구름에 갇혀 있던 능선은 뭉게구름을 등에 이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산행을 마치며 흩어져 버린 안개처럼 번뇌와 걱정들이 말끔히 사라지길 희망해 본다. 운악산 현등사 일주문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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