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산과 앵자봉

by 꿈꾸는 시시포스

햇볕이 좋다. 이사를 오면서 베란다 앞 화단에 내어 놓았던 화분을 정리했다. 결혼식 갈 채비를 하는 아내가 아침에 말아 놓은 김밥과 사과 끓인 물 등을 배낭에 챙겨 넣고 여주 주어리로 차를 몰았다. 근처 가벼운 산행을 할까 하고 아침 일찍 한 시각에 걸려온 친구들의 콜을 완곡하게 사양한 터였다.


새로 뚫린 광주-원주 간 고속도로 초월 IC 부근 정체가 심해 국도로 빠져나왔다. 마을회관 주차장에 도착하여 음료수를 사려고 둘러봐도 주위에 슈퍼가 없다. 마침 노인 한 분이 보여 사정을 얘기하니, 경로당 냉장고를 열어 반쯤 남은 콜라를 컵에 따르고 빈 페트병을 내민다. 수돗물을 담는 내게 이곳 물 맛이 좋다며 마을 자랑을 하신다. 물맛만큼이나 인심도 후해 보인다.

산행은 마을의 개울을 건너 양자산을 오른 후, 반시계 방향으로 주어리 고개 앵자봉 자작봉을 거쳐 다시 주어리로 내려오는 코스다. 이마를 쳐들어야 보이던 봉오리의 팔부능선쯤에서 참나무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멈추어 섰다. 능선을 촘촘히 채운 참나무들 줄기 끝에 어린 가지들이 수북이 돋았다. 무채색 속에 연둣빛을 감추고 하늘로 뻗어 난 모습이 아이들 손가락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겨우내 땅 속에서 숨 죽이고 있다가 봄기운에 새순을 틔우려는 더덕 내음이라도 맡았던지, 멧돼지들은 산길 이곳저곳 낙엽으로 덮인 땅을 파헤쳐 놓았다. 양자산은 높고 낮은 봉오리들과 길고 짧은 능선들을 지나고 나서 모습을 드러낸다. 여주 광주 이천 양평에 걸쳐 있는 해발 710미터 산으로, 경기 한강 이남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표지석 설명이다.


주어리 고개로 내려가는 길 이정표들은 글씨가 지워져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요란한 치장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천박하지만, 자기 색깔을 잃으면 쓰임이 없는 것은 사람이나 이정표나 마찬가지다.

고갯마루에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어 잠시 앉아서 쉬었다. 코스를 정하지 않은 산객들에게 골짜기나 봉오리는 기로다. 이쪽으로 갈 건지 저쪽 편으로 갈 건지, 다음 봉오리로 향할 것인지 내려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하는 지점이다.


주어(走魚) 고개에서 앵자산으로 오르는 길에 부산의 친구 닝의 전화를 받았다. H, S, K 社 등 몇몇 국내 브랜드 차량을 몰아본 게 전부인 내게 자동차 구입에 관해 조언을 구한다. 그에게 K 브랜드를 권했는데 귀담아듣는 듯하다. 그에게 사드(THAAD)는 관심 밖의 일일까?


큰 산을 오르내리고 연이어 다시 높은 산을 오르기는 만만찮은 일이다. 중력을 거슬러 높이 오를수록 몸속 에너지는 바닥으로 떨어질 터이다. 채우고 비우는 일은 일상사요 차고 빈 것을 자랑하거나 나무랄 것도 아니다. 비었으면 채울 여지가 있으니 좋고, 찼으면 비울 여유가 있으니 다행일 뿐이다.


송전탑 콘크리트 기단부에 앉아 김밥과 과일로 허기를 달랬다. 다리 넷을 가진 송전탑은 보조 뼈대가 삼각형 구조로 주 골격을 지탱하며 하늘로 높게 솟아 있다. 삼각관계는 사람 사이에서는 때론 위태하지만, 건축공학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튼튼한 구조인가 보다.


양자산과 앵자봉을 오르내리면서 남녀 한 쌍, 단독 산객 3명, 단체 산객 등 6명과 스쳐 지났다. 그들과 들머리 날머리 산길 상태 산행코스 등 서로 한 두 마디씩 나눴다. 반가움에는 희소성이 있는가 보다. 북적대는 산행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번거롭기만 한데, 인적 드문 곳에서 마주치는 산객은 서로가 반갑기 마련이다.


꾀꼬리가 알을 품는 형세라서 이름 붙었다는 해발 676m 앵자봉(鶯子峰) 정상에 올라서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예봉산과 검단산, 가까이 관산과 무갑산, 멀리 백마산과 태화산, 여주 남한강과 지나온 양자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앵자봉 정상 동쪽 기슭에 있던 주어사(走魚寺)는 1779년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서학을 강학하고 배우던 장소로, 앵자산 자락 서쪽에 안겨있는 천진암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한다.


앵자봉 북쪽 우산리 골짜기에서 꽹과리 장단에 맞춰 부르는 회심곡 곡조가 능선을 타고 올라와 허공으로 흩어진다. 자작봉을 거쳐 마을로 내려오는 내리막길, 무덤 속 망자들은 이승에서 들려오는 저 회심곡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까. 동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저무는 해에 쫓겨 마음속에 일던 조급증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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