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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Dec 01. 2020

공작산 풍치와 따뜻한 인심

어둠이 물러나기 전 동녘 하늘에서 홀로 반짝이는 샛별을 보며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야탑 터미널 11번 플랫폼에서 홍천행 첫차에 오르니 승객은 달랑 다섯 명이다. 서울이 영하 1.9도, 홍천은 영하 4도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일기예보다.

대합실 TV 뉴스에 1,100여 개 농장에서 1,700만 마리를 사육한다는 세계 최대 밍크 생산국 덴마크, 코로나 19로 모든 밍크 살처분 명령을 내린 젊은 여성 프레데릭센 총리가 인터뷰 중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흘러나온다. "마음이 아픕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그녀처럼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을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성남이천로로 들어서니 후미등을 켜고 장사진을 친 채 움직이지 않는 차량들 뒤꽁무니로 버스가 달라붙는다. 다행히 정체가 풀리고 광주원주고속도로 홍천이포 I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버스가 북진해서 양평터미널에 들렀다.

승객 셋을 내려준 버스는 6번 국도를 따라 홍천으로 향한다. 원뿔처럼 우뚝한 백운봉을 앞쪽에 세운 용문산이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양평읍내를 호위하듯 서있고, 두 봉우리가 말안장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솟은 추읍산이 우측으로 스쳐 지난다.

추수가 끝난 너른 들판엔 서리가 내려앉았고, 그 뒤로 멀찍이 물러나 앉아 굽이치는 봉우리들과 능선 사이로 낮게 솟은 아침 태양이 숨바꼭질하듯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도로변 가까이로 다가온 능선 위 낙엽송 가지마다 하얀 서리가 맺혔고 흑천 수면 위에는 물안개가 어른거린다.

용두 터미널 부근에서 44번 국도로 들어서서 신당 고개를 넘어 홍천군 남면으로 들어섰다. 대개의 고장들이 팔경을 내세우지만 홍천은 팔봉산, 가리산, 미약골, 금학산, 가령폭포, 공작산 수타사, 용소계곡, 살둔계곡, 가칠봉 삼봉약수 등 하나를 더 보태어 구경을 자랑하니 가히 산수가 수려한 고장이라 할만하다.


홍천터미널에 내려 M과 만나 서둘러 8:30에 출발하는 동면/서석행 버스에 올랐다. 30여분 후 공작동 정류소에서 내려 아스팔길을 따라 저수지를 지나고 휴양림 쪽을 버리고 공작현 고갯길로 발길을 옮긴다. 멀리 공작산 정상부의 두 봉우리가 보이고 그중 하나에 새 모양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공작새라도 앉아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한적한 아스팔트 길 고갯마루 쪽으로 연이어 지나던 집업 트럭과 승용차가 산객 옆에 멈추어 서며 산불조심을 당부한다. 필시 산림청과 군청 산림 담당 직원일 것이다. 고갯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좌측에 공작산 줄기로 들어서는 들머리가 나온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참나무들이 조용히 동면 채비를 하는 가파른 비탈을 오르며 폐 깊숙이 들이쉬는 공기가 더없이 청량하다. 가파른 비탈을 지나 우측 능선 마루로 올라서니 우측 아래 산줄기 속에 파묻힌 공작현 고갯길이 화촌면 쪽으로 끊어질 듯 띄엄띄엄 이어져 있다.

참나무 위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쉬지 않고 나뭇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참나무 줄기에 귀를 대어보니 그 소리가 도끼질 소리처럼 둔탁하고 묵직하다. 공작산 정상까지는 들머리에서 3.6km, 공작현 고개에서 올라오는 코스와 합쳐지는 지점에서 2.7km 거리다.

바람은 자고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치는 따스한 햇살은 반갑다. 크게 힘든 코스가 없는 능선 앞을 갑자기 암봉이 우뚝 막아선다. 오른쪽으로 내놓은 우회로를 따라 돌면 그 뒤에 공작산 정상이 보인다.

정상 바로 아래 암릉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우리 주변을 맴돌다가 가까이 다가온다. 얼른 등을 내미는 친구 배낭에서 잡곡 과자 하나를 꺼내어 입으로 씹어 부순 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팔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내려앉아 한닙 쪼고 나뭇가지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녀석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가올 겨울이 걱정되기도 한다.

밧줄을 잡고 바위에 의지해서 힘겹게 해발 887미터 공작산 정상에 올라섰다. 긴 트림이 목을 타고 오르며 지난 며칠 동안 명치에 뭉쳐있던 쳇기가 내려가는 듯하다. 전망이 사방으로 트였지만 강우레이더 관측소가 설치된 가리산만 정확히 알아볼 수 있고 계방산 태기산 방태산 등 방향으로 짐작할 뿐이다.

정상에서 갈래갈래 뻗어 내린 능선이 활짝 펼친 공작의 날개를 닮았다는 말처럼 앞쪽으로 뻗은 긴 능선이 여러 갈래 산줄기를 거느린 모습이 일품이다. 말쑥한 화강석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수타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공작산 정상에서 약 2km 지점의 해발 820미터 수리봉으로 오르내리는 좌우 등로는 거칠다. 스테이플러 심처럼 생긴 철심이 박히고 밧줄이 걸린 암벽, 안전 로프가 쳐진 낭떠러지 옆 좁은 능선, 무릎 높이까지 푹푹 빠지는 낙엽 등 만만찮은 길이 긴장을 놓지 않게 한다.

수타사로의 능선은 올라올 때와는 달리 여러 개의 봉우리와 가파른 비탈을 내놓고 우뚝우뚝 암봉이 막아서며 길게 이어진다. 좌우로 굽이도는 능선은 공작이  겹겹 감춰둔 속 깃털을 하나씩 일으켜 세우는 듯하고, 주 능선에서 갈라져 뻗은 줄기 사이사이 봉긋봉긋 솟은 작은 봉우리들은 마치 공작이 알이나 새끼 공작을 품고 있는 듯하다.

피라미드처럼 뾰족하게 솟은 해발 558미터 약수봉에 올라섰다. 표지석 뾰족한 끝 부분이 봉우리를 닮았다. 능선길이 끝나고 이곳부터는 수타사로 곧장 급전직하 내리막길이다. 낙엽 아래 숨어 있는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걸릴까 조심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비탈을 내려갔다.

이무기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용연을 품은 덕치천이 휘도는 곳에 아늑히 자리한 수타사로 내려서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산행을 마친다.
수타사 쪽에서 긴 능선을 따라 여러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고도를 높여 공작산 정상으로 올랐다면 몇 배는 더 힘들고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계곡 위쪽 멀리 약수봉이 솟아 있고 깊게 파인 너럭바위 가운데 물길을 따라 용연으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자빛 용연 옆 안내문은 계곡 옆 산이 홍천 현감의 딸로 태어나 세조의 비가 된 정희왕후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이라 알린다.

석조 공작 암수 한 쌍씩이 장식하고 있는 공작교를 건너 수타사(壽墮寺)를 둘러봤다. 신라 성덕왕 때인 708년 일월사로 창건되고 조선 선조 때인 1569년 현 위치로 옮겨온 사찰이라 한다. 1459년(세조 5) 간행된 최초의 한글본 석가모니 일대기인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月印釋譜)>(권 17·18)를 소장하고 있다는데, 세조가 등창 치료차 오대산 상원사로 가던 중 이곳에 하룻밤 머물며 남기고 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수타사 주변 생태숲, 여물통을 닮았다는 귕소, 삼층석탑 등을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접고 부도군 옆을 지나 버스가 들어오는 공작산 슈퍼에 닿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버스가 들어올 시간까지 한 시간여가 남았다며, 놀러 왔다가 마침 홍천으로 나간다는 친구 두 분에게 낯선 산객을 태워주라 부탁한다. 슈퍼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분을 내려준 영천이 고향이라는 60줄 전후의 어쩌다 기사가 된 그 분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

홍천은 서울 면적의 3배에 달하고 행정구역은 동서 93.1㎞, 남북 39.4㎞, 1819.6㎢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넓다고 한다. 사흘 연속 5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한 가운데 홍천에서도 오늘 공공산림 가꾸기 참여자 등 5명의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터미널에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슈퍼에서 사두었던 초콜릿 두 개를 내밀며 그분 차에서 내렸다.

여차하면 홍천성당과 구 홍천군청(현 홍천미술관) 등을 둘러볼까 하던 생각을 일찍이 찾아온 겨울 저녁에 쫓겨 물리치고 마스크를 꼼꼼히 여미며 동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홍천의 산과 물은 맑고 기이하다.', '골짜기가 깊고 기암절벽으로 된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듯 겹겹이 솟아 있는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등 옛 문헌의 내용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홍천의 산천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쉬이 알아챌 수 있지 싶다.

어느 고장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어디 산수와 풍치로만 따질 수 있을까. 그에 더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심과 풍속이 아니겠는가? 홍천에서 새삼 느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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