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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Dec 03. 2020

태백산 겨울산행

마지막 절기 대한을 하루 앞두고 친구들과 태백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첫 태백산 산행은 5년 전 2월 하순 경 산행의 묘미에 차츰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산 정상의 천제단, 어른 키보다 큰 화강암 표지석, 눈 덮인 능선을 지키고 선 주목 군락 등 인상 깊던 장면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선명히 떠오른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흐른다.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 판교역 플랫폼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전철을 기다린다. 양재역 지하 역사 안과 바깥 산행객을 태울 버스들이 출발하는 정류소 부근엔 배낭을 둘러맨 사람들이 수북이 몰려 있다.

우리 일행 포함 30여 명을 태운 38인승 버스는 목적지 태백으로 향했다.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로 접어들자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김이 잔뜩 서린 차창을 뚫고 들어와 강렬한 햇살을 얼굴에 퍼붓는다.

버스는 제천에서 31번 국도로 들어서서 영월을 지나 태백산과 함백산을 가르는 해발 935m 화방재에 열 시 반경 도착했다. 함백산을 뒤로하고 태백산 줄기로 들어서서 산행을 시작한다. 5년 전에는 시외버스 첫차로 태백으로 와서 유일사 매표소 쪽을 들머리로 잡았었다.

태백산은 2016년 우리나라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우리 땅의 제일 큰 산줄기 백두대간의 중추로 산 정상에 하늘에 제를 올리던 천제단이 있어서 인지 사람들의 태백산 사랑은 남달라 보인다.

올해는 겨울가뭄이라 눈이 드물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산기슭에는 언제 내렸는지 희끗희끗한 장년 머리칼처럼 이곳저곳 쌓인 눈이 띄엄띄엄 눈에 띈다. 도심과 멀리 떨어진 산지라 그런지 미세먼지는 적어 하늘은 높고 시야는 멀리까지 열렸다.


화방재에서 300여 미터 남짓 거리에 있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잇던 옛길, 사길령을 알리는 표지석을 스쳐 지났다. 차갑고 상쾌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키고 내쉬며 평탄한 기슭을 돌고 양 옆으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낙엽송이 빽빽이 도열한 경사진 능선을 오른다.

잠깐만에 산령각이 있는 능선 마루에 올라서서 산행 초입 제자리를 찾으려 거칠어진 숨을 골라본다.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진입하는 가장 가까운 길, 사길령을 넘나들던 보부상들이 산령각을 짓고 매년 음력 사월 보름날에 고갯길 안전과 장사 번성을 기원하며 제를 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태백시 혈리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매년 산령각제를 이어가고 있다니 전통을 지키려는 정성이 가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이 굳게 닫힌 산령각, 제단 위의 태백산 산령 위패와 더불어 제당 정면에는 시종이 끄는 백마를 탄 단종대왕 당신도가 걸려 있다니 그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예전에 소백산 고치령에서도 단종과 그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을 기리는 산령각을 보았었다. 의형제를 맺은 주군 유비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킨 삼국지의 명장 관우의 사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져 있는 중국의 경우와 묘한 대조를 보인다.


바람은 잠잠하고 숲에 쌓여 있는 눈은 솜털처럼 포근해 보여 마치 봄날 같다. 눈 속에 군락을 이룬 산죽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1시간 여 만에 도착한 유일사 갈림길은 유일사 매표소 쪽에서 올라오는 산객들로 덮였다. 그들은 무엇이 급한지 앞사람의 꽁무니에 바짝 붙어 밀고 밀리며 장군봉 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정체를 피할 겸 길림 길 능선 아래 지그재그 100여 미터 가파른 계단길이 인도하는 태백지역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라는 유일사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암봉을 뒤로하고 경사진 계곡에 안겨 있는 유일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 뒤에 탱화 대신 조성해 놓은 부조상이 인상적이다.

계단 길을 거슬러 올라선 산등성이는 여전히 산객들로 붐빈다. 산객들 틈에 끼어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간간이 보이는 주목들은 변한 환경 탓인지 몰려드는 사람들에 시달렸는지 대부분 고사했거나 깊이 파인 몸통을 시멘트로 깁스를 하고 있다. 살아서의 천 년은 고사하고 '죽어서 천 년'이란 말도 옛말이 될 듯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정오쯤 장군봉 아래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 사이 군데군데 눈이 녹은 자리에 단체 산객들이 자리를 잡고 허기를 채운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선 해발 1,567미터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서둘러 지나쳐 갔다.

장군봉을 지나면 저 멀리 평탄하게 이어진 산등성이 언저리에 천제단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장군봉에서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호쾌한 능선과 너른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장쾌한 전망이 남다르다. 산객들이 눈 덮인 능선을 따라 줄지어서 산행하는 파노라마를 보는 것은 태백산행의 백미 중 하나다.

천제단이 있는 태백산 정상에 올라섰다. 토함 지리 계룡 부악(팔공)과 함께 신라 오악(五嶽)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백, 신산(神山)으로 여겨 신라 초기부터 하늘에 제를 올렸다는 태백산의 천제단에서는 지금도 매년 개천절에 제의를 행하고 있다고 한다. 천제단 위 제단에는 '한배검'이라 쓰인 신위가 세워져 있는데 환인 환웅 환검, 즉 세검(三神)의 삼위일체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모시는 것이라 한다.


그저 볼거리의 하나로 여기는 산객들은 천제단 위에서 인증숏 남기기에 여념이 없고 어떤 산악회는 천제단 밖 기단에 제상을 차리고 산행 안녕을 기원하는 축문을 왼다. 천제단 아래 어른 키 보다 더 높은 태백산 표지석 부근에도 인증숏을 남기려는 산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다.

천제단을 뒤로하고 문수봉을 향해 완만한 내리막 길로 접어든다. 산객 대부분은 천제단에서 망경사를 지나 반재로 하산하는 짧은 코스를 선호해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갓져서 느긋하게 걷는 운치가 있다.

문수봉 가는 길에도 잎사귀와 껍질이 없는 고사한 주목들이 살아 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서있다. 떡갈나무 자작나무 등도 거친 환경을 견뎌온 때문인지 줄기가 옹골차고 강인해 보인다. 내리막 뒤에 이어지는 4백 여 미터 오르막 구간의 힘든 고비 끝에 온통 너덜 바위로 뒤덮인 해발 1,517미터 문수봉이 반갑게 맞이한다.

문수봉에 한참을 머무르다가 발길을 옮겨 지척에 있는 소문수봉을 지나면 본격적인 하산길이 사작된다. 햇볕이 덜 드는 탓인지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내리막길을 때로 미끄러져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빠르게 내려간다. 나처럼 아이젠을 신발에 채우지 않은 산객들은 얼어붙은 눈길과 꽁꽁 얼음이 언 계곡 위를 지날 때 게걸음을 하고 때로 꽈당 크게 넘어지기도 한다.

화방재 산행 들머리에서 처럼 날머리 부근 산기슭도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잘 자란 낙엽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60년대 조성된 50년 수령의 태백산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50만 여 그루, 국립수목원과 환경단체 등의 산림훼손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래종'이라는 이유로 태백산 국립공원사무소의 벌목 계획이 실행된다면 그 장관은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낙엽송 군락과 계곡 옆으로 난 길을 한참만에 빠져나오면 당골이다. 마침 어제 제26회 '태백산 눈축제'가 태백산 국립공원, 황지 공원, 태백역 일원에서 개최된 탓인지 거대한 눈 조각상 눈 썰매장 등이 마련된 당골광장 부근은 말 그대로 행락객들로 인산인해다. 눈 조각 전시장을 잠시 둘러보고 식당가 아래쪽 공터에 임시로 들어선 천막 식당에서 뜨끈한 국밥을 한 그릇씩 들었다.

행락객들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뒤섞인 당골 계곡 1.5km여를 천제단길을 따라 빠져나왔다. 5년 전 겨울 끝자락에 홀로 찾았던 한긋진 산행 때와는 달리 행락객과 산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태백산이 측은해졌다. 빨리 겨울이 지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몸을 버스에 싣고 귀로에 올랐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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