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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an 03. 2021

노고산, 신년 해맞이 산행

이른 새벽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새해 둘째 날인 토요일에 신년 해맞이 산행을 하기로 친구들과 약속을 한 터였다. 여러 장소 가운데 코로나 19 거리두기를 감안해서 출입통제 지역을 피해 고양시 효자동과 양주시 장흥면의 경계를 이루는 노고산으로 정했다.


다섯 시경에 집을 나서 분당 수서 고속화도로 청담대교 내부순환로 홍은 IC 통일로를 차례로 거쳐 한 시간 만에 양주시 삼하리 입구에 도착했다. 곧이어 도착한 M, H와 합류하여 전원일기 마을을 지나 금바위 저수지 산행 들머리에 차를 세우고 산행 채비를 했다. 일출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어 어둠은 아직 물러날 기미가 없고 갓 보름을 넘긴 하현달이 계란 노른자처럼 밝고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별들이 어두운 하늘에 또렷하게 점점이 박혀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옆 전망데크에는 비박 텐트도 한 동이 놓여 있다.


노고산 정상까지는 대략 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니 마음은 여유롭다. H가 선두에서 리딩을 하며 렌턴에 의지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초의 감악산 산행에 이어 약 한 달만에 셋이 다시 모였다. 새해 달력과 더불어 충전기를 선물로 들고 온 M과는 한라산 산행에 이어 삼 주일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돌아보면 친구들과의 산행 이력은 2014년 12월의 검단산 송년 산행부터 시작되었으니 6년이 넘었다. 꽃 피고 신록 번지는 봄의 산, 녹음 무성하고 폭염에 쌓인 여름의 산, 억새 춤추고 단풍 곱게 물든 가을의 산, 눈꽃과 상고대로 뒤덮인 겨울의 산,... 돌고도는 계절을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쉬지 않고 오르내린 산행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평이한 산길을 따라 옥녀봉에서 노고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올라섰다. 검푸른 하늘과 또렷한 경계를 이루며 불그스레한 광채를 쓴 채 우뚝 솟은 검은 산군이 불쑥 나타났다. 어둠이 빛과 씨름하며 밀려나려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북한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비롯해서 원효봉 영봉 등 여러 봉우리들이 거대한 수석처럼 실루엣을 드리운 모습이 흡사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도담삼봉을 보는 듯하다. 삼하리와 저수지의 갈림길이 있는 능선쯤에서 어둠이 온전히 물러났고 노고산 정상도 지척으로 다가와 있다.


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돌아 얼굴에 와 닿는 공기는 차갑지만 가슴 깊숙이 찬찬히 마시고 내뱉는 들숨과 날숨이 시리도록 상쾌하다. 해발 487미터 노고산은 군부대가 자리한 정상을 대신하여 그 아래 표지석이 지키고 서있는 넓은 헬기장이 산객을 맞는다."북한산을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이름난 산이라서 그런지 백패킹족들의 텐트 10여 동이 널찍한 공간에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해맞이보다 비박이 목적인 듯 일출이 임박했음에도 텐트 안은 조용하기만 하고, 산객은 많아야 고작 스무 명도 되지 않아 보인다. 작은 텐트촌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로 올라서서 주황빛 광채를 머금은 북한산 능선 쪽을 향해 일출을 기다렸다.  


새해 첫날인 어제와 달리 날씨가 맑고 공기도 깨끗해서 북한산 낮은 능선 너머로 용문산 백운봉이 선명히 모습을 보인다. 말간 얼굴의 고운 달은 아직도 높은 하늘에 머물고 있고, 얕은 구릉과 마을들이 서로 어우러진 서쪽 방향은 거칠 것 없이 서해 바다 쪽으로 펼쳐져 있다.7시 50분이 조금 지나자 북한산 영봉 오른쪽 사면 위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명을 온전히 밝히려는 듯 강렬한 빛을 뿜으며 능선 위로 솟는 모습이 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다. 장갑을 벗고 분주히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금세 저리도록 시려온다.

노고산 정상부에서 비박을 한 후에 해맞이를 하는 산객들

금바위 저수지와 삼하리의 갈림길에서 H의 제의로  허목(1595-1682), 이시선(1625-1725), 추사(1786-1856), 허전(1797-1886) 등과 관련된 바위글씨들이 남아 있다는 삼하리 쪽 노고산 서쪽 기슭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013년경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이 발견하면서 알려진 '삼하리 바위글씨군'은 '노고산 독재동 추사 필적 암각문'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산기슭을 한참 동안 내려가서 흐르던 물이 얼어붙은 작은 계곡을 만났다. 공릉천의 지류 중 하나인 작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 '夢齋(몽재)'를 비롯하여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이 지은 <고양산수기>에 나온다는 可濯泉(가탁천), 流磨瀑(유마폭), 萬懿窩(만의와) 등 계곡 여기저기 바위에 새겨져 있는 각자들을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찾아보았다.


고리타분한 주자학에 안주하여 정권을 장악한 노론 천하에 맞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실학의 싹을 틔운 선각자들의 흔적들이 꽁꽁 얼음으로 덮인 추운 겨울의 계곡에 이리저리 방치된 모습이 안쓰럽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앞선 혜안과 사상은 경원시되고 핍박받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우연찮게 근기남인(近畿南人)들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이곳을 찾아 그들의 흔적을 보고 느끼는 감회가 남다르고 귀하게 여겨진다.


삼하리 마을 입구로 내려와서 친구들의 차를 회수하러 금바위 저수지로 거슬러 차를 몰았다. 꽁꽁 얼어 있는 저수지가 새삼 산객에게 한겨울임을 상기시킨다. 노고산 자락에는 지봉유설을 남긴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1563-1628), 근대 선각자였던 월남 이상재(1850-1927), 태종의 손자인 복성군 등의 묘역도 자리한다. 이들 중 금바위 저수지 뒤편 산기슭에 있는 이상재 선생의 묘소와 복성군 묘역을 둘러보았다.

삼하리 계곡에는 추사와 실학 선구자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로 내려오며 MBC에서 1980-2002년간 방영한 <전원일기>의 초기 촬영지인 '전원일기 마을' 세트장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벽면을 채운 최불암, 김혜자, 김수미 등이 등장하는 드라마 장면들을 둘러봤다. 22년 간 총 1088부작으로 방영된 이 TV 드라마가 최근에 케이블 채널에서 다시 방영되고 있어 풋풋하고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새해 해맞이 산행이 뜻하지 않은 인문 산행과 향수를 되살려 주는 추억으로의 산행을 겸하게 되었으니 '대박'을 좇고 기원하는 허망한 산행에 비할 바가 아니지 싶다. 해장국을 들며 출출한 배를 채우고 한기를 몰아내며 새해를 향한 긴 항해의 돛을 올린다. 2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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