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장(丽江)에서 저녁 기차로 쿤밍(昆明)에 도착하여 전철로 호텔로 이동한 후 하루를 묵었다. 봄의 도시(春城)라는 말처럼 쿤밍의 공기는 한여름이라는 것을 잊게 하지만 택시 기사는 금년은 예년에 비해서 기온이 높다고 한다.
윈난성에는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25개 민족이 거주하여 '인종 박물관'이라 불리는데, 소수민족이 윈난성 전체 인구의 38%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상을 한곳에서 엿볼 수 있다는 쿤밍시 서남쪽 띠엔츠(滇池) 부근에 위치한 윈난성 민족촌을 둘러볼 요량이다.
택시로 민족촌 북문에 도착해서 입장권을 90위엔에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이라 민족촌은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선홍색 의복 구슬 장식 모자를 쓴 이족(彝族) 처자가 바로 옆에 위치한 이족 마을 방향을 일러주고 재빠르게 지나간다.
고대 강족(羌族)의 후예로 량산(凉山) 자치주에 주로 거주한다는 이족은 중국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으로 300여 종의 전통복장이 있다고 한다. 뜨락에 큰 술항아리가 놓인 가옥 안을 둘러보고, 통닭 바비큐를 화로 위에 걸어 놓은 마당 옆 움막에서 이족 남성 두 명이 피리로 연주하는 전통음악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다.
바이족(白族)촌에서는 민속의상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아담한 크기의 정자처럼 생긴 무대 위에서 짧은 전통공연을 펼쳐 보인다. 바이족은 따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한 남조(南詔, 653~902) 왕국에 이어 22대 300여 년 동안 지속한 따리국(大理国, 938~1253)의 주인공이다.
따리는 해발 4000여 미터의 창산(苍山)이 버티고 그 앞에 거대한 얼하이(洱海)가 펼쳐진 천혜의 지형으로 대리석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몽고(蒙古) 쿠빌라이의 침략 때 금사강 협곡에 의지해 버텼으나 나시족(纳西族) 도움으로 강을 건넌 몽고군에게 멸망하여 지금도 나시족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따리국 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전통적으로 출가했다는 창산 숭성사(崇圣寺)를 둘러본 감흥이 새롭게 밀려온다.
리장(丽江)에 많이 거주하는 나시족(纳西族)의 가옥으로 들어섰다. 쓰허위엔(四合院)처럼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복층 목조건물이 둘러선 가옥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곧 시작하려는 공연을 기다린다. 나시족은 금사강(金沙江)이 지나고 옥룡설산(玉龍雪山)이 있는 리장에 많이 거주하고 동파문(東巴文)이라는 고유 민족 문자를 갖고 있다. 전시관에 걸린 동물 사람 사물 등을 닮은 그림처럼 생긴 동파문자가 독특하고도 재미있어 보인다.
그 옆 장족(壮族) 마을로 이동했다. 전시관 문 앞 처마 아래 앉아 있는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장족은 중국 제2의 민족으로 총인구가 2천만여 명이며 운남성에만 1백만 명 정도가 거주한다고 한다. 16년 전 북경에서 같이 근무했던 장족 출신 친구 사진을 보여주니 전형적인 장족 미남이라고 한다.
장족은 동족(獞族)이라 불리다가 1965년 주언라이가 장족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더란다. 이들이 주 거주지 광시(广西) 지역은 고온다습하여 대나무나 나무로 지은 '마란'이라는 2층 집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청나라에 반기를 든 태평천국(太平天囯, 1851~1864)은 광시지역을 중심으로 장족이 주도했다고 한다.
몽골족 일부가 윈난의 펑산(凤山) 등에 이주 정착하여 현재 약 2.8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1252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감숙과 사천을 지나 금사강을 건너 따리국을 멸망시켰을 때 유입되어 그 일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기락족(基诺族)은 쉬상반나에 주로 거주하며 인구는 2만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념품점에 진열된 주인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온갖 종류의 장신구와 탈이 볼만하다. 기락족 목조 가옥 2층에서 라후족(拉祜族) 청년이 기타를 치고 기락족(基诺族) 처녀는 악보를 손에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야오족(瑶族) 마을로 들어서니 반왕묘(盤王廟) 앞에 태극 문양이 눈에 들어온다. 광시 후난 장시 귀주 등에 약 2백만 명 거주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어린 두 아이를 옆에 두고 정성스럽게 샤오취엔펀(小卷粉)를 만드는 야오족 젊은 여성의 마음 씀씀이가 큰 감동을 자아낸다. 야오족은 주로 산지에 거주하면서 계단식 화전을 경작하는데 830여 종에 이르는 약재를 생산 활용하는 장수 민족이라고 한다.
'동방의 집시'로 불리는 먀오족(苗族)은 양자강 중하류 황하 유역에 거주하였으나 이민족과의 갈등으로 윈난 등 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인구 942만 명으로 동남아에 거주하는 몽족과 동족으로 자신들이 치우 천황의 후손이라 여기고 있다.
운남성에 65만 명이 거주한다는 회족 마을의 모스크와 주거지에는 인적이 없고 적막하기만 하다. 만주족 가옥은 너른 마당을 중심으로 회랑처럼 건물이 둘러서 있고, '청죽 민족(青竹民族)'이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리수족(傈僳族) 마을에서는 활 궁노 등과 함께 하나의 술잔으로 함께 술을 마시는 남녀 사진이 여러 장 걸린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누족(怒族)의 악기 전시관에는 수 백 가지의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푸미족(普米族)은 인구 약 3.3만으로 리장 누장 대협곡 향그릴라 부근에 주로 거주한다고 한다. 푸미족 청년이 양두금(羊头琴) 연주를 들려준다. 와족(佤族) 마을로 들어서니 술 주(酒) 글자를 써붙인 큰 항아리가 보이는데, 건장한 청년이 씩씩한 말투로 미주(米酒)라고 일러준다. 코로나19 발발 이전에 많은 한국인 단체 관람객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와족은 '산 위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삼국지> 칠종칠금(七縱七擒) 이야기의 주인공 맹획이 와족이라는 설도 있다. 1950년대 이전까지 남아 있던 인두제(人头祭) 풍속이 지금은 소 머리를 바치는 의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곳곳에 주렁주렁 물소 머리 장식이 걸려 있던 이유를 알겠다.
푸랑족(布郞族) 마을에는 귀신 문양의 그림이 곳곳에 그려져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푸이족(布依族)은 윈난에 약 5.5만 명이 거주하며 주 거주지는 구이저우로 중국 내 인구수는 10번째인 약 3백만 명이라고 한다.
따이주(傣族) 마을 건물 2층 불당으로 계단을 밟고 오르니 10세에 출가해서 10년째 불가에 몸담고 있다는 21세 청년이 맞이한다. 중국 내 자신의 종족은 160만 정도이고 세계적으로 미얀마 태국 등에 600만 명이 거주한다고 알려 준다.
하니족(哈尼族)은 윈난성 산악지대에 거주하며 층계식 논을 경작하고 보이차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장족(藏族)은 티베트 지역이 주 거주지인데 민족촌 내 티베트식 사찰에는 승려 두 분이 계시다고 한다. 경내의 마니차를 한 바퀴씩 힘껏 돌리고 다음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징포족(景颇族)은 인구 약 15만 명으로 미얀마 부근에 360만 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처마 밑에서 쭉 뻗은 두 다리로 날줄을 지지하고 한 줄 한 줄 더디게 씨줄을 엮어가는 징포족 젊은 여성의 손길이 꼼꼼하고 표정은 진지해 보인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더양족(德阳族)는 인구 2만으로 린창(临沧) 지역에 주로 거주한다고 한다. 아창족(阿昌族) 영역으로 들어서니 2층짜리 목조 건물에서는 남녀 한 쌍이 밀대를 들고 민요풍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닥 청소가 한창이다. 하루를 마감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대문 옆 건물에는 온갖 종류의 칼이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를 지켜보던 다부진 아창족 청년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가 전시관 좁은 공간에서 한바탕 칼 무술 시범을 보여주는데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정문 격인 동문으로 나서서 차마고도(茶马古道) 조형물이 있는 윈난 민속박물관과 식당 상점가 등을 지나쳐 소수민족의 숲을 빠져나왔다.
중국 내 55개 전체 소수민족의 인구는 다수 민족인 한족의 10% 남짓이다. 명분과 실제가 다른 소수민족 우대정책, 이촌과 도시화 심화 등에 따라 갈수록 소수민족들의 결속력은 약해지고 한족에 흡수 동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쪼록 저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끝까지 잘 지켜내어 표본실의 박제처럼 좁은 민족촌에서만 접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