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소의 해'가 꼬리를 보이며 저 멀리로 걸음을 재촉하는 세모다. 일에 밀리고 이제 저제 주저하다가 남겨둔 연가 일수를 조금이나마 줄여볼 요량으로 며칠 휴가를 냈다.
코로나19로 인한 중국 각지의 이동통제 등 방역정책이 워낙 엄중해서 좀처럼 상하이 시내를 벗어날 용기가 나질 않는 요즘이다. 주말과 신정 휴일까지 합하여 근 일주일의 시간에 떠밀려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새벽같이 몸을 일으켰다.
숙소와 회사 사이를 오갈 때만 잡던 운전대를 처음으로 고속도로로 돌려 60여 km 거리에 있는 저우좡(周庄)으로 향했다. 인생 첫 차로 중고차를 구입해서 도로 주행 연습을 하던 때 일산 시내에서 자유로로 잘못 들어서서 어쩔 수 없이 한강대교 부근까지 차량의 흐름 속에 덩달아 휩쓸려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서 상하이와 충칭을 연결하는 G50번 후위까오수(沪渝高速)에 올랐다. 차에 하이패스처럼 자동결제 시스템을 장착하지 않아서 톨 게이터에서 유인 게이터("人工通道")를 놓칠까 하여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무엇이건 첫 경험은 떨리고 긴장되기 마련인가 보다.
저우좡 고진(周庄 古镇)은 쑤저우 남동쪽 쿤산(昆山)과 우장(吴江), 상하이 세 곳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국가 5A급 관광지이다.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이곳의 민가 약 60%가 명청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800여 가구 원주민들이 옛 터전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안내문이 주요 명소로 쌍교(双桥)를 비롯한 수로 위의 옛 돌다리들과 전형적인 옛 민거(民居) 주택인 썬팅(沈厅) 등이 있다고 소개한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상하이와 장쑤성(江苏省)의 경계를 지나자 저우좡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저우좡 대교(周庄大桥)를 건널 때 동편 호수 위로 갓 떠오른 태양이 구쩐(古镇)과 어우러져 오렌지빛 장관을 펼치고 있다.새해 일출을 보러 세 시간 여 차를 몰아 속초로 달려가던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새 해를 이틀 앞두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새해 일출의 장관을 미리 본 듯하여 마음이 흡족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마을 입구 패루로 들어서서 천천히 차를 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저우좡 농무 시장(农贸市场)' 입구에 차를 세웠다. 아침 일곱 시경 농무 시장 건물 입구에 주민 네댓 분이 모여서 호수에서 갓 건져 올린 듯 보이는 게, 새우 등이 든 그물망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흥정이 한창이다. 건물 안은 생선 등 어물과 갖가지 채소가 거래되고 있지만 손님들은 뜸하고 상인들만 각기 점포 앞을 지키고 있다.
작은 주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쩐으로 향한다. 길 좌우 건물들 대부분이 비어있고 행인도 드문드문하여 마치 무협영화에나 나올법한 유령도시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구쩐 입구 부근 버려진 듯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6각 5층 전복탑(全福塔)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에서 구쩐을 사방으로 조망해 보았다. 높은 빌딩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옛 양식의 건물들만 빽빽하게 모여 있는 풍경이 명청 시대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권을 사서 8시경 구쩐 안으로 들어섰다. 이른 시각임을 감안해도 관람객은 눈에 띄지 않고 안내원과 보안(保安)들만 곳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 철 지난 바닷가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중국 제일 수향", "5A 국가급 여유 경구(旅游景区)"라는 표지석의 문구가 무색하다.
텅 빈 수로 나룻배 위에서 인부 두 분이 긴 그물채로 물 위에 뜬 나뭇잎을 건져내고 있는 모습이 돌다리 밑으로 눈에 들어온다. 수로를 따라 쌍교(双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도중에 심씨의장(沈氏义庄)에 들렀다. 의장(义庄)이란 일종의 자선 구호시설로 북송의 정치가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소주에서 처음 개창하여 민간 자선사업의 전범이 되었다고 한다.
심씨의장은 명대의 건물로 2005년에 저장성 진해현(镇海县) 출신의 미국 국적 화가이자 시각예술가로서 저우좡을 알리는데 일조한 첸이페이(陈逸飞, 1946-2005)를 기리기 위한 장소로 바뀌어 내부에 그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의 1983년작《故乡的回忆》로 인해 이곳 쌍교가 유명해졌고, 그 쌍교로 인해 저우좡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니 일견 그에 대한 예우로서 합당해 보인다.
쌍교 실제 모습(좌)/첸이페이(陈逸飞)의《故乡的回忆》(우)
심씨의장에서 만난 첸이페이(陈逸飞)의 그림
단층짜리 소담한 옛 건물 안 여러 전시물 가운데 다섯 여인과 한 중년 남성이 마작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작을 하고 있는 그림이 특히 눈길을 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윤곽과 표정의 선명도가 서로 바뀌는 인물 한 명 한 명의 얼굴에서 각 인물들의 내면까지 담아낸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곁가지 좁은 수로변 출구 쪽 장랑 골목 현켠에서 벤치를 수리하는 목공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수로 건너편 건물 위에서는 인부 두 분이 지붕을 손보고 있다. 저 모습들도 언젠가 코로나19가 물러나고 다시 인파로 붐비게 될 호시절을 준비하며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삶의 일단일 터이다. 수로를 따라 늘어선 텅 빈 식당들엔 탁자 위에 빈 그릇만 가지런히 놓여 있고, 곳곳에 무료한 듯 어깨를 늘어뜨린 순시원들만 눈에 띈다.
두 수로가 교차하는 곳 좁은 수로와 조금 더 넓은 수로 위에 각각 하나씩 직각으로 돌다리가 놓인 쌍치아오(双桥)가 나타났다. 호수와 수로를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보니 수로 위에 놓인 돌다리들이 일품인데 원·명·청 시대에 놓인 석교(石橋)가 14개 남아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다리가 일명 열쇠교(钥匙桥)로도 불린다는 이 쌍교(双桥)로 각각 세덕교(世德桥)와 영안교(永安桥)로 불린다고 한다.
쌍교 부근 모퉁이에 자리한 큼지막한 식당도 매한가지로 텅 비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식당 입구 진열대 위의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갖가지 요리 조형물에 걸레질을 하고 있다. 나를 보더니 들어와서 식사하기를 청하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거나, 돌다리 위를 건널 때나, 수로 쪽으로 다가가는 등 발길을 움직이고 시선을 돌릴 때마다 눈에 저절로 그림 같은 풍경이 포착된다. 찬 공기에 스마트폰 셔트를 누르는 손이 곱다. 아홉 시가 지나자 골목 건물 틈새로 파고드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반갑다.
노파가 수로 가에서 찬물에 손을 넣어 무와 걸레를 씻고 있다. 특유의 연녹색 물빛에 수질이 깨끗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수로로 놓인 계단 가장자리에 앉아서 빨래를 하고 채소나 생선을 손질하는 주민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수로 건너편 보도 가장자리엔 빈 배들이 거적을 뒤집어쓴 채 줄지어 매여있다.
한 노파에게 물속에 물고기가 있는지 물어보니, 당연한 듯 있다고 대답한다. 오래전 얘기이긴 하지만 서진(西晋)의 관료요 문학가였던 장한(张翰)이 부패한 정치에 싫증을 느껴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서 낚시로 세월을 낚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장팅(张厅)을 둘러보고 선팅(沈厅)으로 가는 좁은 골목에는 소뿔로 만든 빗 가게, 찻집, 기념품점 등 몇몇 상점들이 문을 열었다. 상점 주인들의 얼굴에는 수심만 가득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중국보다 코로나19 상황이 더욱 심각한 한국의 영세 상인들이 겪고 있는 고초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강남제일민거(江南第一民居)'라고 알려진 썬팅(沈厅)이 좁은 골목에 접해 있다. 게이트 격인 장문루(墻门楼)에서 안내원에게 입장권을 내보이고 바코드 스캔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썬팅은 첫 번째 홀 차청(茶厅)으로 시작해서 '송무당(松茂堂)'과 '난계제방(蘭桂齊芳)' 편액이 각각 걸린 정청(正厅)과 대당루(大堂楼), 그리고 소당루(小堂楼)와 주방이 딸린 연회장까지 일직선으로 깊숙이 하나의 건물처럼 이어져 있다.
명청 시대 천 여호 민가 중 약 60%가 옛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이곳의 옛 주택 중에서 썬팅은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대표적인 민거(民居)인 셈이다.
기실 이 저택은 원말 명초 부호 심우(沈佑)의 아들 심만삼(沈万三, ~1379)이 원나라 말 이곳으로 이주하여 거주한 곳이라 한다. 그는 상인 육도원(陆道源)의 이재를 관리하면서 거금을 마련하고 무역활동에 총력을 기울여 강남 제일의 갑부로 등극하며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 초년 만리장성과 난징성 중수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나, 명태조의 시기를 받아 운남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배 기간 중 차마고도에서 사업에 재기하였다고 하며 홍무 12년(1379년)에 세상을 떠나 이곳 저우좡의 은자빙(银子浜)에 잠들어 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연해지역에서 활개하던 왜구의 약탈을 막고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해 해금 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하여 무역을 금지하였으니 시운이 따르지 않은 셈이다. 몸소 "때가 영웅을 낳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時造英雄 英雄時造)"는 말을 증명해 보인 도마 안중근 의사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썬팅(沈厅)에서 첸이페이(陈逸飞)의 유화 작품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정청(正厅) 옆 통로 벽면 등에 거장 우관중(吴冠中, 1919-2010)을 비롯한 작가 서너 명의 작품 20여 점이 걸려 있어 보물을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다.
우관중 작품의 하나같이 밝고 다채로운 채색과 가볍고 경쾌한 붓놀림에서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은 거장의 낙천적이고 유연한 정신세계와 천재적 예술 감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혁신과 전통을 접목하고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현대 정신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로운 해법을 제시" 했다고 설명한 칼럼의 글이 눈에 띈다. _정윤아, <매경이코노미 제1995호>
첸이페이(陈逸飞)의 《안개 낀 저우장(雾中的周庄)》, 《저우좡 수향》, 《<고향의 기억(故乡的怀忆)》등 작품 속의 운하, 돌다리, 나룻배 등이 이곳의 정취를 잘 표현하고 있다.
왕창카이(王昌楷)의 《彎彎的月亮挂周庄》은 초승달이 지기 전 초저녁의 달빛이 어른거리는 푸른빛 운하와 민가의 붉은 지붕과 하얀 벽이 또렷한 대조를 보이면서도 서로 조화로운 모습을 잘 담아냈다.
우관중(吴冠中)은 《저우좡 水巷》, 《저우좡》, 《저우좡 早市》, 《저우좡 老墻》 등의 작품에서 저우좡의 다양한 모습들을 단순한 듯하면서도 밝고 경쾌한 필치로 깊이 있게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양밍이(楊明义)의 《저우좡 春雨》, 《저우좡 细雨》, 《저우좡 人家》, 《江南烟雨天》 등 작품들은 날씨와 계절에 따라 바뀌는 저우좡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화폭에 옮겨 놓은 작품들이다. 마치 작은 미술관 한 곳을 둘러본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썬팅(沈厅)을 나섰다.
벽면과 진열대가 저우좡을 소재로 한 수묵화 족자와 액자로 채워진 한 화방의 주인은 여전히 탁자 위 화선지에 저우좡 풍경을 그리고 있다. 길거리 어물전에서는 노파 너댓이 건어물을 널어놓고 앉아서 잡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남호 추월원(南湖秋月园)'이라는 구역으로 들어섰다. 꾸쩐 남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난후(南湖)가 펼쳐져 있고 호수 위에 데크를 놓아 경관을 조망토록 해놓았다. 이마 위로 떠 오른 아침 해가 아치형 교각의 긴 돌다리 '전복장교(全福长桥)'와 수면 위로 강렬한 햇살을 내리비친다. 보름달이 떠오른 밤이라면 흥취가 절로 솟구칠 듯싶다.
노년의 남녀 일행 중 여성 한 분이 무대처럼 너른 데크 한편에서 행위예술 춤사위를 펼치고, 둘러선 일행은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의 동작이 멎자 일제히 박수를 보낸다. 노년의 여유롭고 활기찬 모습이 보기에 좋다.
송나라 때인 1086년 창건되어 한 때 '수중불국(水中佛国)'이라 칭할만큼 번성했던 전복강사(全福讲寺)의 호수에 접한 산문은 굳게 닫혀 있고, 담장 너머 경내는 퇴락한 새월의 흔적과 고요만이 겹겹이 싸여있다.
난후(南湖) 위 석교가 바라다 보이는 양지바른 식당 앞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밥 먹고 가라"라고 발길을 붙잡는다. 점심시간으로 조금 이르긴 하지만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는 식당의 창가, 난후와 석교 등 정취에 이끌려 식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추천하는 달팽이 추어 등 각종 생선 요리들은 '아점'으로는 과하다 싶어서 볶음밥 한 그릇을 시켰다. 양저우 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경험했던 황홀했던 그 맛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생선 비린내가 씹히는 볶음밥은 '추월 원주가(秋月苑酒家)'라는 근사한 식당 이름에 한참 미치치 못했다. "뿌하오이쓰(不好意思)"라는 말을 남기며 볶음밥 반 이상을 남기고 식당을 나섰다.
아침 햇살 아래 담소하는 주민들, 생선 건조 모습이 눈에 띈다.
자사호제작방(紫砂壶製作坊)과 서시호(西施壶)
뼈를 발라낸 생선을 끈에 꿔어 빨래줄에 늘어 놓은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가에서나 보던 광경을 호수와 운하가 많은 중국 강남의 수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듯 하다.
이싱(宜兴)에서 생산되는 도기 차 주전자(茶壶) 매점 두 곳이 거리를 조금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차례로 들러 보았다. 이곳에서 '서시호(西施壶)'로 불리는 차 주전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의외의 기쁨이다. 온전한 명칭은 서시유호(西施乳壶)로 줄여서 서호(西壶) 또는 서시유(西施乳)라 부른다는데 주전자의 주둥이, 두껑 정수리, 손잡이 부분이 각각 고대 중국 4대 미인 중 한 사람인 서시(西施)의 입, 유두, 잘록한 허리를 닮은 것이라 한다.
명나라 때의 도예가 쉬여우촨(徐友泉, 1573-1620)이 창안한 차 주전자의 한 형식으로 말 그대로 서시처럼 아름다거나 서시에서 영감을 받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서시(西施)의 아름다운 용모를 차 주전자에 담아 표현해 낸 도예가의 기발한 발상과 그 온전한 조형미에 감탄이 절로 우러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들른 '자사호제작방(紫砂壶製作坊)' 여주인은 남편이 도자기 장인이고 자신도 도자기를 빗는다고 한다. 가게 벽면에 붙은 남편의 프로필 사진과 도록에 수록된 사진들을 들추고, 도자기 재료인 자사(紫砂)의 원석을 칼로 긁어 보이는 등 마치 제자에게 이싱 도자기 제조법을 전수라도 할 태세로 열성적으로 설명을 이어간다.주먹만한 것부터 다양한 크기의 서호(西壶)에 자꾸 마음이 끌렸지만, 만만찮은 가격에 미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슬며시 발돌리는데 가게 주인은 "메이꽌시"라는 말을 던지며 손님을 보낸다.
송나라 때 건립된 도교사원 징허도원(澄虛道园)과 옛 덕기주점(德记酒店)이던 미루(迷楼) 등을 훑어보았다. 미루(迷楼)는 1909년 쑤저우에서 설립된 부르주아 혁명문화단체 '남사(南社)'의 발기인 류야쯔(柳亞子) 등이 1920년대초 이곳에 네 차례 모여서 흥을 돋우며 지은 100여 편의 시를 엮은《迷楼集》으로 인해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저우좡 풍경구를 한 바퀴 둘러보고 원점 부근으로 돌아오니 '저우좡 박물관'이 기다리고 있다. 복층 구조 건물의 박물관은 이곳의 역사, 인물, 풍속, 문화 등 전반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오전 여덟 시경 풍경구로 입장할 ㄸㅐ내 질문에 대해 안내원은 "세 시간은 소요된다."고 대답했는데, 오후 세 시경에 빠져나왔으니 일곱시간 동안 둘러본 셈이다. 수향(水鄕)을 뒤로하고 상하이로 향하는 마음 속에 저우장의 구석구석을 더 자세히 더 깊숙히 들여다보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