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으로 '갓파 종주'라는 파계사 쪽으로의 긴 산행에 접어든다. 미움, 자책, 욕망, 소망,.. 지고 왔던 마음속 무거운 짐은 갓바위 앞에 툭 던져 내려놓았다. 갓바위 비껴 좌측 능선은 벌써 가을이 한창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갓바위 부근과는 달리 능선 너머 단풍 깔린 길은 오솔길처럼 오붓하다.
저만치 눈 앞에 단풍으로 붉게 물든 능선 위로 노적봉이 거대한 암봉을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 멀리 팔공산의 서쪽 주능선이 머리에 낮게 깔린 흰 구름의 띠를 두르고 길게 뻗어 있다. 푸른 산죽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서 붉은 단풍과 대비를 이룬다.
가볍게 발을 띠며 걷는 능선길은 한동안 앞쪽보다 뒤돌아 서서 보는 풍경이 더 장관이다. 능선재로 접어들며 뒤로 돌아 갓바위와 인사를 한다. 은해봉에서 사과를 한 입 배어 물었다. 멀리 동봉 능선에 걸려 있는 신비로운 구름은 걷힐 줄 모른다. 갓바위에서 1.8km 지점 능선재는 동봉, 갓바위, 은해사로 갈리는 분기점으로 동봉까지는 5.5km다.
암릉 길이 폭신한 흙 길로 바뀌었다. 언제 떨어졌는지 모를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도 만난다.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에 달린 잎사귀들이지만 어떤 가지의 것은 푸르고 어떤 가지의 잎사귀는 붉게 각기 개성을 고집하고 있다.
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여러 갈래 산줄기들은 깊은 골 위에 고랑처럼 솟아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모습은 강렬한 태양 아래 검푸른 바다에서 건져내는 다시마 줄기에 햇살이 비치는 모습 같다.
삿갓봉은 앞으로 가야 할 능선을 훤히 드러내는 기막힌 조망처다. 멋진 풍경에 황홀해하는 눈과 함께 귀로 낙엽 부서지는 소리, 흙 밟는 소리, 바람 소리를 나직이 음미하며 걷다가 동봉에서 넘어온다는 산객 한 분을 만났다. 안개와 바람으로 추운 그쪽에 비해서 이쪽은 봄날 같다고 한다.
도마재에 서있는 안내지도를 보니 가야 할 길이 온 길보다 더 길다. 지나는 능선 부근 곳곳에 선돌처럼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 노적봉을 비롯해서 험한 바위 절벽이 가로막은 능선을 발치에서 올려다보며 좌우로 우회했다. '많은 길을 돌아다녔지만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는 노래 <마이웨이> 가사로 위로를 삼을까.
동봉 못 미쳐서 웬만한 겨울산행 때 못지않게 바람이 매섭다. 많은 산객들이 동봉 정상 주위 여기저기 바위 아래에서 찬 북서풍을 등지고 앉아 휴식을 취하며 자리를 뜨지 않고 눈앞의 장관에 취해 있다.
팔공산의 최고봉 해발 1193미터 비로봉은 동봉과 지척이다. 동봉 아래 서쪽을 바라보고 선 6미터 높이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인상적이다. 비로봉 정상 옆에 통신용 철탑들은 부자연스러운 듯 완만한 능선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참배객들이 대부분인 갓바위 쪽과는 달리 이쪽은 산길과 둘러앉기 좋은 공터가 등산객들로 붐빈다.
비로봉에서 서봉 쪽 길을 찾아 두어 번 오르내리다가 낙타봉 쪽으로 내려와서 정상코스를 찾아 접어들었다. 등산로를 조금 벗어난 곳 비로봉 기슭 너른 터로 거슬러 올라 암벽에 양각된 마애 약사여래좌상을 둘러보았다.
서봉에 못 미쳐 전망 좋은 봉우리의 너른 바위에 앉아 배낭 열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오도재를 지나 서봉으로 가는 가파른 능선에 놓인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비로봉과 동봉이 장관을 펼친다. 갖가지 모양새의 바위들로 덮인 동봉은 흡사 가야산 서성재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뒤돌아본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비로봉 동쪽의 동봉에 구색 맞추기 격으로 붙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서봉은 동봉에 비해 낮고 별다른 특색도 없다. 많은 산객들은 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동서봉과 가깝고 오르기가 용이한 동화사나 수태골을 산행기점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거워진 다리와 지끈거리는 발바닥을 산행이 절반을 넘어섰다고 다독이며 다시 파계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거칠고 거대한 암반이 성채처럼 늘어선 병풍재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가마 바위봉과 상여바위봉을 우측 아래로 우회한다.
파계재로 가는 칼날 능선이라 불리는 능선은 폭이 좁고 곳곳에 바위가 숲처럼 솟아 진행이 더디다. 능선을 넘는 찬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리며 온몸을 서늘하게 한다. 파계봉 아래 자리하는 '파계사'의 한자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혹여 수도승이 이 길을 택해 고행을 한다면 힘이 들어 파계(破戒)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중간의 '계'를 두고 鷄 戒 溪로 각각 의견이 갈렸는데, 파계봉 정상에 자리한 한글 표지석도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파계봉에서 파계재로의 능선은 지나온 암릉길의 노고를 위로하듯 소나무 숲에 밟기에 폭신한 흙길이다.
산길은 고도를 낮추며 계곡 너덜 바윗 길로 접어들어 인내심을 시험하며 지루하게 이어진다. 물이 마르던 계곡이 줄줄줄 소리를 내며 제법 계곡 다워지자 파계사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고목이 늘어선 지장전 쪽으로 내려섰다. 다른 세계처럼 다리 건너 계곡 저편에 자리한 극락전에 한 번 눈길을 주고 본전인 원통전과 미타전 응진전 적묵당 등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전각 아래를 통해 파계사 본당 경내로 드는 출입문 격인 진동루(鎭洞樓) 앞 안내문을 읽으니 파계사(把溪寺)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통일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사찰로 조선왕조의 원찰이 된 파계사는 아홉 줄기로 흩어져 있는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사진 아스팔트 길을 한참 내려와야 만나는 일주문을 나서서 다시 한참을 걸어야 오토캠핑장을 지나서 버스종점이 나온다. 단풍축제가 열리고 있는 정류장 부근엔 먹거리 노점 등이 늘어섰고 간이 무대 위 가수는 한산한 관객에 개의치 않은 듯 노래에 열중한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오르며 종일토록 붉은 단풍, 늠름한 솔, 기암절벽, 사찰, 석불, 마애불, 황홀한 하늘과 구름 등과 어우러졌던 산행을 마무리한다. 단풍을 붉게 물들이며 불타오르던 태양이 노곤해진 몸을 누이려는 듯 완만히 뻗어 내린 서편 산줄기 뒤로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