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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an 21. 2022

봄의 전령 라메이(腊梅)

상하이 쩐루 구쩐(真如 古镇)

상하이 지하철 15호선 야오홍루(姚虹路) 역에서 전철을 타고 상하이 북서쪽 푸퉈구(普陀区)에 위치한 쩐루구쩐(真如古镇)으로 향했다. 구쩐(古镇)은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대 주거성 취락지를 일컫는 말로 상업과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도 앱을 검색해 보니 상하이에는 쩐루(真如)를 비롯해서 주지아지아오(朱家角), 치바오(七宝), 뤄디엔(罗店), 티엔덩(天灯), 펑징(枫泾), 자오지아뤄(召稼楼), 리우허(浏河) 등  개의 구쩐이 검색된다.

메이링 북로(梅岭北路) 역에서 내려 메이촨루(梅川路)를 따라 시용강(西虬江) 위 작은 다리를 건너 강을 따라 구쩐으로 향했다. 메이촨루에 접한 아파트 단지 입구의 키 큰 동백이 짙녹색 잎사귀들 틈새로 올망졸망 꽃망울을 영글어 놓았다. 그중에 하나는 길지도 않은 강남의 겨울이 다 지나기도 전에 한송이 꽃을 활짝 피워 놓았다.


십여 년 전 1월 중순 쯤 발령을 받아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처음으로 중앙로 도로변에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과 대면했었다. 사 년 전 두번째로 부산 발령을 받고 밤차로 서설이 흩날리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간 때도 1월이었다. 그때도 역시나 다름없이 부산세관 화단, 용두산 공원, 충렬사 등 여러 곳에서 다소곳하게 피어 수줍은 웃음으로 객수를 달래준 것이 동백이었다.


노래 '동백 아가씨'로만 알고 있던 동백이 내게 각별한 꽃으로 남게 된 연유이다. 그즈음 알게 되어 한동안 중얼거리던 노래가 이제하 님 원곡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으로 가객 조영남이 <모란동백>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곡이다.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 속에 웃고 있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 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 돌다 떠 돌다

어느 모랫 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 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_이제하 词曲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中


좁은 강 위에 놓인 다리 위를 행인들과 오토바이들이 연신 오간다. 다리 양쪽 편에는 롱징 차(龙井茶)를 파는 노인과 칭포(青浦) 갯벌에서 주웠다는 조개를 칼로 까고 있는 노인 등 몇몇이 자리 잡고 앉았다. 강변 산책로 건너편 작은 대나무 숲에 왜가리 등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지하철 공사가 한창인 우닝로(武宁路) 사거리 건널목을 건너서 쩐루구쩐 패루로 들어섰다. 2차선 차도 좌우로 늘어선 아파트 사이에 장랑처럼 기와지붕을 덮은 보도가 길게 뻗어 있다. 말이 구쩐이지 우리나라 여느 도시의 전통시장 골목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마트 입구에서 어른 키보다 긴 죽순을 액즙기에 넣어 즙을 짜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죽순 즙 맛이 궁금하기도 해서 6위엔을 주고 100ml쯤 용량의 플라스틱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구쩐 북단에 쩐루쓰(真如寺)가 자리한다. 정문인 남문은 주택가와 맞닿아 갑갑해서 그런지 굳게 닫혀 있고 그 대신 동쪽 문이 정문 구실을 하고 있다. 보루처럼 좌우에 고루와 좌우가 자리하고 그 가운데 사천왕과 금강역사 두 분이 좌우에 자리하는 천왕전이 자리한다. 은행 고목 둘레 철책에 건강 재운 승진 합격 등을 기원하는 소망을 적어 넣은 리본들이 빼곡히 걸렸다.

보현전과 문수전, 석가여래전과 약사여래전을 좌우에 두고 중앙에 대웅보전이 자리한다. 미얀마에서 만든 석가모니 옥불을 좌우에서 가섭과 아난 양 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그 후면에는 석가모니불과 등을 맞대고 관음보살이 동자와 용녀의 협시를 받으며 자리한다. '석가여래' 현판이 걸린 전각엔 와불과 함께 살아생전 극락왕생을 열망하던 수많은 망자들의 명함 크기 위패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쩐루구쩐 패루/쩐루사 사면 관음상/쩐루 불탑

대웅보전 뒤 원통보전 앞뜰에 놓인 화분의 동백들은 꽃망울이 영글대로 영글었고 몇몇은 알을 깨고 갖 부화하려는 새알처럼 분홍빛 꽃잎을 내밀고 있다. 보전 축대 가장자리에 앉은 비둘기 한 마리가 머리를 잔뜩 움츠리고 눈을 감은 채 졸고 있고, 원통보전 안에는 사면 관음보살입상이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다소곳한 모습으로 중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관음상 머리 위 돔처럼 생긴 원형 천정 둘레에 불상 조각들을 앉힌 배치 양식이 인상적이다.

원통보전과 사찰 맨 뒤쪽의 장경루 사이에 쩐루불탑(真如佛塔)이 자리하고 있다. 53미터 높이로 1999년 건립된 이 탑은 1층이 이중 처마로 된 9층 4각 목탑으로 근처 멀리에서도 우뚝 솟은 모습을 볼 수 있어 이 지역의 랜드마크라고 한다.

탑 주위 5미터 길이 회랑이을 따라 걸으며 탑 1층 외부 정면의 석조 보살상 8위를 만날 수 있다. 탑 내부는 상층으로 통하는 문은 굳게 잠겨있는데, 3층부터 최상층까지 양쪽 벽에 목각된 3천 존의 석가모니불과 함께 53가지 선(禪) 지식을 찾아가는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탑 둘레에 어른 키 높이 108개의 윤장경이 빼곡히 둘러섰다. 탑신 앞에 서있는 안내문 설명을 살펴보았다.

"불탑은 곧 부처님의 법신이다. 불탑을 참배하는 것은 악업을 없애고 지혜를 늘리며 탐욕, 노여움, 무지, 게으름, 의심 등의 번뇌와 장애를 없애고, 재난과 질병을 피하는 편리하고 쉬운 방법이다.  

시계방향으로 걸으며 경전이나 만트라가 쓰여 있는 윤장(輪藏, 또는 경륜 經輪) 수레바퀴를 돌리면 경전을 낭송하는 공덕이나 다름없다. 이 공덕이 모든 사람에게 널리 퍼져 우리와 모든 중생이 함께 부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탑 앞마당 좌측 나무기둥 위에 망루처럼 자리한 비둘기 둥지에서는 살이 오른 비둘기들이 다소곳이 앉아 있거나 서로 장난을 치며 포근한 겨울 햇볕을 즐기고 있다.

윤장 바퀴를 손으로 돌리면서 탑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12시 반경이 되자 원통보전을 비롯한 사찰 경내에 목탁소리와 함께 불경 암송하는 소리가 일제히 울려온다.


사찰 서편 쩐루강(真如港) 수로에 접한 장랑(长廊)을 이 사찰의 백미로 꼽을 수 있지 싶다. 고승들의 모습과 행적을 새긴 비각과 함께 각종 수묵화를 액자에 담아 걸어 두었는데 제목만 대충 훑어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봄을 알리는 목단 <보춘도(报春图)>, 암탉들을 거느린 장탉 <길상도(吉样图)>, 바람에 휘청이는 대나무 숲 사이를 나는 참새들 <죽림칠현도(竹林七贤图)>, 낙산대불 전도, 새우 수염과 발가락 표현이 단순한 듯 멋스러운 <하취도(虾趣图)>,


폭포를 휘감고 운해를 드리운 깊은 산속에 산사를 감추고 있는 <심산 장고사(深山藏古寺)>, 맹호를 옆에 둔 <십년면벽보살(菩提)>, 사이좋게 어우러진 두루미 한 쌍 <쌍학도(双鹤图)>, 흩날리는 눈발 속에 핀 매화 <비설영춘(飞雪迎春)>, 경인년에 그린 작은 고슴도치 한 마리를 눈앞에 두고 몸을 잔뜩 웅크린 맹호 <맹호도(猛虎图)>, 여름날 돛단배가 떠 있는 장강의 저녁나절 수묵화,


노송 아래 긴 다리 긴 부리의 한 무리 두루미 <군학도(群鹤图)>, 연꽃이 떠 있는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들 <어락도(鱼乐图)>, 알이 쏟아져 떨어질 듯 벌어진 석류 <석과(碩果)>,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송학 <수송(壽松)>, 노도처럼 질주하는 한 무리의 말 <군마도(群马图)>, 여섯 마리 잉어 <육시길상(六时吉祥)>, 해탈의 깨우침에 희열 하는 나한들 <나한도(羅漢图)>, 연꽃 핀 연못에서 물고기를 부리에 문 오리 한 쌍 <하당전적(荷塘真蹟)>,...

장랑과 전각 사이에는 예쁜 분수대가 있는 연못이 자리하는데 수백 마리 붉은 잉어 떼가 유유히 유영하는 연못 속은 수중 낙원처럼 보인다.

장경고 부근에서 출구 쪽까지 이어진 장랑을 두어번 왕복하며 걸린 그림들을 찬찬히 감상하고서 천왕문을 나섰다. 향연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대형 향로 앞에는 여전히 향을 사르고 허리를 굽혀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쩐루공원(真如公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때가 되어서 인지 출출해하는 배가 채근을 하는 차에 길거너 샨시(陕西) 음식점 간판의 "시안 미식정선(西安 美食精选)"이란 글귀가 눈에 띈다. 네댓 평 남짓 넓이의 그 식당 안으로 얼른 들어서서 비앙비앙면(比昂比昂面) 한 그릇을 시켰다.

지난해 시월 뤄양 출행 때 중원 땅 관문 통관(潼关)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산북역 앞 식당에서 그 지방 고유 음식인 비앙비앙면을 처음 마주했었다. 특별했던 그 기억이 떠오르며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큰 사발에 담겨나온 넓고 두꺼운 면발은 본고장 식당에서 보던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데 콩나물, 칭차이(青菜), 작게 썰은 돼지고기, 토마토 등 여러가지 재료가 함께 들어간 것이 훨씬 더 먹음직스럽고 그럴듯한 음식으로 보이게 한다.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주인 내외에게 고개를 들이밀며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자 단박에 한국인임을 알아차리며 반색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여 지난해 12월 23일 0시를 기해 '일과 생산을 멈추고 출입을 불허함(停工停产 不进不出)'식의 전면 봉쇄에 돌입한 시안 주민들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고초를 생각하자니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쳐든다.


식당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어 쩐루공원(真如公园)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침 매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일반 매화보다 일찍 개화하는 황매화(라메이, 腊梅)가 공원 여기저기에서 연노랑 빛깔 꽃을 활짝 피웠다.


상하이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담장으로 둘러싸인 평지 위에 조성된 공원은 각종 수목과 연못 등이 어우러져 있다. 특이한 점은 공원 안에 송전탑이 몇 개 서있고 위로 여러 갈래 송전선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자칫 오가기를 꺼리는 흉물스런 곳이 되었을 수도 있는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든 발상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근에 사는 노 사진작가들이 모두 다 모여든 듯 저마다 무거운 카메라를 하나씩 양손으로 받쳐 들고 꽃이 전하는 계절의 섭리를 담아 내려 포커싱에 열중이다. 나도 덩달아 스마트폰 렌즈를 꽃송이 가까이 가져가 본다.

작년 2월 말 새로운 임지인 상하이에 도착했다. 2주일간의 격리를 끝낸 다음날인 3월 중순 주말 난샹(南翔) 구쩐을 찾았을 때 날씨는 쌀쌀했지만 봄기운이 완연했었다.

"한 곳에 뿌리를 모으고 배추 포기처럼 무성한 줄기를 하늘 높이 뻗은 푸른 대나무, 화사한 연분홍 매화, 농염한 자태의 자목련 등 초목들, 연못 속의 물고기, 상춘객들이 함께 유유자적 강남의 정취를 만끽하는 무르익은 봄날이다." _2021.3월 난샹 구쩐


쩐루 공원 입구 쪽 담장에 저장성 진화(金华) 출신으로 남송 때의 명신인 정강중(郑刚中,1088-1154)의  <라메이(腊梅)>를 비롯하여 황매화에 관한 여러 편의 시(诗)가 적힌 목판이 붙어있다. 소한과 대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가지마다 맺은 꽃망울을 터트린 수수해 보이면서도 단아한 자태의 이 꽃에 그 누군들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곧 다가올 설  연휴가 지나면 입춘이니 봄도 머지않았다.


缟衣仙子变新装,浅染春前一样黄。

不肯皎然争腊雪,只将孤艳付幽香。

_郑刚中의 <腊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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