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을 이틀 앞둔 주말, 날씨가 연이틀 화창하다. 상해시 바오산구(宝山区) 북서부에 위치한 뤄뎬 구쩐(罗店古镇)을 찾아가는 길이다.
교외로 향하는 15호선 전철은 승객이 많지 않고 빈자리도 많아 여유로운데, 구춘(顾村) 역에서 환승한 구쩐 방향 7호선은 웬일인지 많은 승객들로 왁자지껄하다.
수향(水鄕) 뤄뎬 구쩐은 바오강(宝钢)과 월포(月浦), 자딩 구(嘉定区), 구춘 진(顾村镇), 바오산 공업단지 및 뤄징 진(罗泾镇)과 동서남북으로 각각 접해 있는 수륙 교통 의 요지인데,이 마을의 역사는 원대(元代)까지 6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명 만력 연간에는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과 무역이 번성했고, 청 강희 연간에는 면화와 면포 교역이 번창하여 '금라점(金罗店)'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구쩐 입구(@photo by bloger 赵景林)
종점 한 정거장을 남기고 지상으로 올라온 전철 차창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전철 7호선 종점인 메이란후(美兰湖) 역에 내려서 1km여 거리의 구쩐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뤄펀로(罗芬路)를 거쳐 온갖 건축자재 전기 기자재 등을 파는 상점들이 길게 늘어선 뤄타이로(罗太路)를 따라 한참 동안 걸었다.
뤄타이로가 뤄성로(罗升路)와 만나는 지점 길 건너 빌딩 틈새에 번자체로 '羅店古鎭'이라는 현판이 걸린 구쩐으로 들어가는 패루가 눈에 들어온다.
패루로 들어서니 단층 구옥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담장처럼 늘어서 있다. 그 초입에 꽃무늬 면포를 취급하던 '진정태화행(陳正泰花行)' 구옥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문화혁명 광란의 앞잡이 홍위병(红衛兵)의 손에 훼손되었던 것을 후에 정비하여 집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번성했던 영화는 흘러간 시대와 함께 옛이야기로만 남았지만 그 흔적이라도 건사하게 되어 다행한 일이다.
'진정태화행(陳正泰花行)' 옛 면포점
패루에서 북쪽 수로 쪽으로 곧장 90여 미터 직진하면 신교(新桥)가 맞이한다. 구쩐 마을은 동서로 뻗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남측 스허지에(市河街)와 북측 팅치엔지에(亭前街) 거리가 새로 세운 신교(新桥)에서 오래된 따통교(大通桥)까지 350여 미터 가량 펼쳐져 있다.
신교(新桥) 앞에서 수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스허지에(市河街)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긴다. 좁은 수로 양측 제방처럼 높게 쌓은 석축 위에 복층 주택들이 마주 보며 늘어서 있다.
배수구에서 수로로 물 떨어지는 소리, 수면에처럼 수면에 어리는 건물들의 음영, 수로 저편의 아치형 따통교(大通桥), 가끔씩 오가는 동네 노파들, 집 앞에 드러누워 햇볕을 즐기는 누렁이들,... 독특한 풍치가 시간을 거슬러 옛 구쩐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어느새 구쩐의 동편 가장자리에 있는 따통교(大通桥)에 닿았다. 명나라 때인 1472년 처음 건설되고 청나라 때인 1731년 중건된 500여 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다리다. 남쪽 측면에 2층에 정자가 있는 이 다리는 빠오샨(宝山区)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상하이의 몇 안 되는 고정자교(古亭子桥) 중 하나라고 한다.
따통교(大通桥)와 라계초당(罗溪草堂)
다리 옆 '라계초당(罗溪草堂)'이란 현판이 걸린 이 정자 벽면에는 주련처럼 '상하이 해구 서화원(上海海鷗書畫院)'라는 세로글씨 목판이 함께 걸려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니 어린아이 두어 명과 중년 여성 한 분이 가운데 놓인 큼지막한 탁자 위 화선지에 검은 먹물로 정성 들여 반듯하게 한자의 획을 긋고 있다. 아래층에서도 어린아이들 대여섯 명이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교량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한참 동안 바라다보던 위로 볼록하게 반원형으로 생긴 길이 18미터 높이 7미터 폭 4.5미터의 따통교(大通桥)를 지나 수로 북측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쩐 수공 탕위엔(古镇手工汤圆)' 식당
그 초입에 '구쩐 수공 탕위엔(古镇手工汤圆)'이라 쓰인 현판이 내걸린 식당이 자리한다. 그 입구에서 태연히 드러누워 있던 견공 두세 마리는 들고나는 손님들이 귀찮은 듯 천천히 일어서서 느릿느릿 자리를 옮긴다.
안으로 들어서서 벽에 붙은 메뉴를 보니 '탕위엔(汤圆)'이라는 생소한 음식 이름이 눈에 띈다. 두어 평 주방이 딸린 대여섯 평 좁은 가게는 시골집 안방 마냥 열 명 남짓 손님에도 복작댄다.
가게 벽면 탁자 위에 재료가 담긴 그릇을 놓고 할머니 두 분이 탕위엔을 빚고 다른 탁자 앞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쫑즈 속을 큰 댓잎에 싸고 있다.
송나라 때 명주(名州, 현재 닝보)에서 유래했다는 탕위엔은 정월대보름에 꼭 챙겨 먹는 한족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 중 하나라고 한다. 흑임자와 돼지기름으로 만든 소에 설탕을 곁들여 찹쌀가루로 싸서 동그랗게 빚은 것으로 증기로 쪄내는 우리의 송편과 달리 물에 끓여서 익혀 낸다.
아마도 보름달이 밝게 뜨는 날 가족과 함께 둥근달을 닮은 탕위엔을 들며 달처럼 원만하고 행복한 삶을 기원했을 것이다. 지차이러우(荠菜肉) 탕위엔 3개를 시켰다. 좁은 가게나 한참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고 특별한 곳 특별한 음식의 맛을 보려는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하나 둘 찾아든다.
탕위엔(汤圆)과 만드는 모습
주방에서 조리를 하는 여주인이 한참만에 말간 국물 속에 탱자 크기의 동그란 탕위엔이 담긴 그릇을 가져다준다. 모양새와 속 재료 등을 유난스레 살피는 내 모습에 외국인이라 짐작을 했는지 조금 후에 냉이 하나를 들고 와서 냉이로 속을 채운 지차이러우(荠菜肉) 탕위엔은 특히 상하이에서 즐겨 먹는다고 한다.
열닷새 전 정월대보름이 지났지만 이국 땅에서 이민족의 음식 탕위엔 한 그릇으로 절기의 흐름을 되짚어 보며 객수를 달래는 감회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방의 주인 부부에게 향긋한 냉이 향의 특별한 맛을 잘 느꼈다고 고마움을 전하고 식당을 나섰다.
구쩐 좁은 골목 위 지붕들 틈트인 하늘로 일사불란한 대오를 지어 날으는비둘기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간다.
팅치엔가(亭前街)의 구쩐 지역 오른쪽 도로 건너편엔 지붕 없는 회랑처럼 좁은 시장 골목이 길게 뻗어 있다. 채소 과일 잡화 화초 곡물 어물 주류 빵집 떡집 육류 옷가게 이발소 편의점 등 노점상과 점포들이 끝이 없을 듯 이어진 그 시장 골목을 가로질렀다.
팅치엔가(亭前街) 시장골목과 구쩐 골목
화신(花神) 동상이 맞이하는 화신 광장을 끼고 뤄시로(罗溪路)와 스이로(市一路)를 거쳐 골동품점 기념품점 화랑 등이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선 구쩐 북측 팅치엔가(亭前街)로 다시 들어섰다.
깊숙한 골목 작은 문 너머 포커 게임을 하던 노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 흘깃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탁자 위로 돌린다. 새치가 성성한 홍징쉔(弘景軒) 주인장은 실내의 화분을 햇볕 좋은 바깥으로 옮기고 있다. 앙증맞게 아담한 돌다리 겅푸교(梗浦桥)와 신교(新桥)를 건너서 구쩐을 빠져나왔다.
왔던 길을 피해 다른 길로 갈 요량으로 뤄성로(罗升路) 동쪽 끝에서 메이란후 전철역 쪽으로 이어지는 난농가(南弄街)로 접어들었다.
양팔을 벌리면 좌우로 손이 닿을 듯 좁고, 행인과 오토바이가 연신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고, 지붕들 틈새로 빼꼼히 하늘이 비치는 난농가(南弄街)는 이곳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