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얼음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코앞에 와 있으니 봄도 머지않았다. 무박이일 혹은 일박이일 일정으로 카이펑(开封)을 둘러볼 요량으로 오후 세 시경 집을 나섰다.
짧은 일정이니만큼 배낭을 단출하게 해야 어깨가 편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 보조 배터리와 충전기, 귤과 믹스 커피, 상하 내의와 셔츠 한 벌, 세면도구 등을 배낭에 넣었다.
일기예보는 내일 상하이 기온이 최고 22도 최저 9도로 완연한 봄날씨인데 비해 북쪽에 위치한 카이펑은 최고 17도 최저 영하 1도라고 한다. 배낭 속에 셔츠 한 벌을 더 넣은 까닭이다.
전철 10호선과 4호선을 갈아타며 상하이역에 도착했다. 신분 확인과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해서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중국 정부가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돌아선 때문인지 기차역은 지역 간 이동 통제가 비교적 느슨하던 두 해 전처럼 열서너 개의 지역별 출발대기 대합실이 여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다.
상하이역
야간 침대열차
예매해 두었던 상하이를 출발해서 정저우가 종착역인 16:23발 K152 야간 침대 열차에 올랐다. 이 열차는 고속철 요금보다 절반 가량 저렴하고 여행객은 시간과 숙박료를 절감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열차의 잉워(硬卧) 3층 침대 객실의 21번 중간층(中鋪)에 배낭을 내렸다. 승객들은 침대열차가 익숙한 듯 마주 보는 침대의 아래위 지정 좌석에 몸을 누이거나 통로 창 측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삐거덕 소리를 짜내며 긴 몸통을 움직이기 시작하던 열차는 속도를 올리며 관성의 미끄럼틀을 타자 미끄러지듯 철로 위를 빠르게 달린다.
사람도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궤도에 안착하기까지 삐걱거리는 역경을 겪기 마련이다. 버거운 중력의 벽을 넘어 한 번 우주 궤도에 들어서면 수월하게 도는 인공위성처럼 관성이 붙고 나면 거저먹기다. 열차는 속도를 조절하며 달려서 14시간 후 내일 아침 06:23경 카이펑역에 도달할 것이다.
차창 밖 스쳐 지나는 풍경들은 우시를 지날 즈음 어둠에 묻혔다. 쿤산, 쑤저우, 우시(无锡), 창저우(常州), 단양(丹阳), 쩐장(镇江), 난징(南京), 추저우(滁州) 등 거쳐 지나는 곳마다 정차해서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며 북상한다. 정차하는 역마다 승객들이 늘어서 객실 침대 칸은 빈 곳이 없어 보인다. 젊은 학생, 아주머니, 아저씨 등 남녀노소 다양한 장삼이사(張三李四) 승객들이 달리는 열차 침대에 하룻밤 몸을 맡겼다.
저녁 무렵 강릉을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청량리역에 도착하는 비둘기호를 탔던 육군 일병 때의 흐린 기억이라도 꿈속에서 되살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칸에 올라 몸을 누였다. 철로 위 울컥 대는 바퀴의 울림이 누인 몸 전체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어렴풋이 들었던 잠이 다시 머리를 쳐든다. 밤 열 시쯤 달리던 열차가 뻥부(蚌埠) 조금 못 미쳐 샤오허쩐(小溪河镇) 부근에 정차해서 소등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몸 뒤척이는 소리, 코 고는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옆 철로를 쏜살처럼 달려 지나는 열차 소리 등만 간간이 들린다. 철로 위의 'K152 열차 호텔' 4호차에 투숙한 셈이다. 좁고 불편하지만 중국이 아니면 결코 해볼 수 없을 특별한 경험 하나를 더 추가하니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열한 시 반경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6시 반경 열차가 카이펑 역에 정차했다. 새벽 네 시 반경 열차가 상치우(商丘)를 지날 때쯤 잠에서 깨었었는데, 여러 승객들이 어깨 아래로 머리를 깊숙이 숙인 채 창 측 간이 의자나 침대에 걸터앉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불편하여 잠을 이루기 어려웠거나 목적지가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출구를 빠져나오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작은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로막은 채 하차한 승객들을 향해 마치 싸움을 걸기라도 하듯 거칠고 높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외쳐댄다. 택시 기사들이 호객을 하는 모습인데 말로만 듣던 허난(河南) 사람들의 거친 기질을 카이펑에 도착하자마자 목도하게 된다.
중국 허난성 황하강 남쪽에 자리한 이곳 카이펑(开封)은 하(夏), 위(魏), 후량(梁), 후진(晉), 후한(漢), 후주(周), 북송(北宋), 금(金) 등 여덟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팔조고도(八朝古都)이자 난징, 뤄양, 베이징, 시안, 안양, 항저우와 함께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불리는 역사가 오랜 도시다.
카이펑 기차역
카이펑 성곽 / 개봉부
카이펑의 대표적 명소 중 개봉부, 상국사, 그리고 중국인들이 제일의 국보급 유물로 뽑았다는 '청명상하도'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청명상하원(清明上河园) 등을 가급적 도보로 둘러볼 요량이다.
역사 앞 이차선 도로 건너편에 단층짜리 건물들에 들어선 식당 서너 개가 불을 밝히고 있다. 그중 핸드 스피커를 든 호객꾼이 열심히 손님을 부르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관탕빠오(灌汤包)를 시켰다.
닭 요리인 통즈지(桶子鸡), 잉어 요리인 리위베이미엔(鯉魚焙面), 땅콩 케이크인 화셩까오(花生糕) 등 꼭 맛보리라 생각했던 이 지역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인 관탕빠오를 카이펑에 도착하자마자 먹어볼 수 있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탕빠오는 강남 지역 샤오롱빠오(小笼包)의 원조격으로 모양새와 맛이 샤오롱빠오와 흡사한데, 크기가 두세 배 크고 발효된 피를 사용한다고 한다. 스피커에서 기차역 앞 허름한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케니 지(Kenny G)의 색소폰 연주곡 '러빙 유(Loving you)'가 감미롭게 흘러나와서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식당을 뒤로하고 2킬로여 거리 개봉부(开封府)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중산로를 따라 북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의 얕고 낡은 건물들이 '마도(摩都)'라 불리는 높고 번화한 빌딩이 즐비한 상하이와 대비되며 전혀 다른 쇄락한 어느 작은 지방 도시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빈허(滨河) 위로 놓인 다리를 통해 7미터쯤 높이의 개봉 장벽(城墙) 안으로 들어섰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장벽 안쪽 공터에서 성벽을 백 보드 삼아 테니스 연습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아직 이른 아침인 7시 반경 포공호(包公湖)를 마주보며 남향으로 자리를 잡은 개봉부(开封府) 성문 앞에 도착했다. 개봉부(开封府)는 북송 수도 동경(东京)의 행정 및 사법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천하의 으뜸 관아(天下首府)'로 알려져 있다. 개봉부를 둘러싼 성벽 바깥 너른 광장에는 한 무리 사람들이 느릿하게 동작을 맞춰 태극권 수련에 집중하고 있다.
성문 정문과 마주 보는 넓고 큰 벽면에는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신수 해태(獬豸)가 전력질주하며 이마에 달린 외뿔로 무언가를 들이받는 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고 옳고 그름, 선과 악, 충신과 간신을 분별할 수 있어 간사한 관리를 발견하면 뿔로 쓰러뜨려 창자를 먹어치운다고 한다.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는 포청천 등 청렴강직한 판관들이 부윤으로서 집무를 보던 개봉부의 성문 앞에 용맹과 공정을 상징하는 신화 속 해태상을 조성해 놓은 까닭일 것이다.
북송의 수도로서 가장 번성한 때의 인구가 100만여 명에 달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하니, 분쟁과 송사도 많았을 터이니 관아에 대한 백성들의 공평무사한 법 집행에 대한 요구가 컷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