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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Mar 07. 2023

팔조고도(八朝古都)  카이펑(3/3)

대상국사와 청명상하원

대상국사와 노지심


주말의 아침은 아직 일러 고도의 길거리 사람 모습은 드문드문하다. 간혹 스쳐 지나는 사람들 중 젊은 남성들은 남쪽 강남지방 사람들에 비해 체격이 커 보이고 걸음걸이도 호기롭다. 대로에서 어수선해 보이는 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대상국사(大相國寺) 정문 앞에 도착했다.


북제(北齊) 때인 555년에 창건된 고찰로 당나라 예종이 황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712년에 '대상국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전란과 수해로 훼손되었던 것을 청나라 강희 10년(1671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개봉부와 마찬가지로 이곳 사찰에서도 입장료를 받고 있다. 상하이 등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대도시들과는 달리 지방정부의 재정이 넉넉지 않은 까닭인 듯싶다. 이들 명소의 입장료는 개봉부가 65위안, 이곳 상국사가 40위안, 청명상하원이 120위안이다.


산문으로 들어서니 계단 아래 넓은 마당 너머 천왕문이 보이고 그 좌우로 고루와 종루가 마주 보며 자리한다. 좌측 고루에는 재신 관우, 종루에는 지장보살의 조상(彫像)이 각기 좌정하고 있다. 고루 앞에 버드나무를 뽑 노지심(鲁智深)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본명은 노달(鲁達)로 고전소설 수호전(水滸傳)의 캐릭터 중 한 명이다. 원래 위주(渭州, 현 간쑤성 平凉) 경략부에서 군대 훈련과 도적을 감독하는 직무를 담당하던 제할(提辖)이었는데, 주먹으로 악질 진관서(鎭關西)를 때려죽이고 관부를 피해 출가하여 ‘지심(智深)’이라는 법명을 갖게 된다.


가공할 힘과 완력의 소유자로 맨주먹이나 무기를 든 싸움에 모두 절륜한 실력을 뽐냈다고 한다. 화통한 성격에 인정 많고 의협심이 강한 반면, 불같은 성미와 고약한 술버릇도 가진 전형적인 협객형 인물이다.


여기에 그의 동상이 자리한 것은 한때 이곳 상국사에 적을 두고 소작농들의 채소밭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하며 행패와 도적질을 일삼는 양아치들을 제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 위에서 우는 까마귀 소리가 거슬리자 버드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린 일화에서 그의 기질과 괴력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상국사 경내의 노지심 동상(우)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방문했을 때 시내 어느 광장 가장자리 길 옆에서 안데르센의 동상을 만난 적이 있다.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인어 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등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 그의 명작 동화들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꿈과 감동을 주고 있다.


수호전은 당나라 때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구어체 형식의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인 최초의 소설로 통념의 경계를 넘어 과장, 미화, 해학, 풍자 등 다양한 문학적 도구와 재료에 무한한 상상력을 버무려 낸 작품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상식과 몰염치가 판치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희망과 위로를 건네주고 있으니 무협소설 장르상 다소 허황된 요소가 있은들 무슨 흠이 될까.


주 건물들을 따라 난 종축 바닥 꽃무늬 벽돌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천왕전과 대웅전 사이에는 방생지가 자리하고 그 위에 걸린 아치형 석교가 아름답고 연못 속 거북과 학 조각상은 수려하다. 석교를 건너면 대형 철제 향로 탑과 그 양쪽에 탑신 각 층 각 면마다 불상을 돋을새김 한 팔각구층 석탑이 나란히 자리한다.


대웅보전에는 협시보살과 함께한 석가모니불을 비롯해서 여러 나한들 가운데 오른쪽 팔을 하늘로 길게 뻗치고 있는 탐수나한(探手羅漢; explore hand Luo's man)과 가슴속에 부처상을 펼쳐 보이는 개심나한 (開心羅漢)의 독특한 형상이 눈길을 잡는다.


상국사의 전각들 가운데 팔각 전각에 사면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그 둘레의 2층 회랑 구조 전각 안에 오백나한상을 층층이 조성한 오백나한전이 압권이다. 장경루에서는 태국에서 온 황금과 옥석으로 장식한 진녹색 유리보살과 상하이 옥불사에서 보았던 석가모니상과 모습이 흡사한 아름다운 백옥석 석가모니불이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장경루에도 좌우와 뒤편 벽 둘레에 아름다운 나한 조각상을 배치했다. 한 시간 이십여 분만에 상국사 경내를 설렁설렁 둘러보고 거쳐 왔던 전각들을 거꾸로 거슬러서 가며 산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인 청명상하원을 향해서 북쪽으로 뻗은 보행가 거리로 들어섰다. 건물 벽과 지붕이 아치형 곡선 창틀과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으로 치장한 로코코 풍의 2~3층 높이 상가 건물이 양쪽으로 줄지어서 있다.


보행가 북쪽 출구 부근 '대환가(大丸家)'라는 가게에서 꼬치 어묵을 들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장에게 부탁해서 콘센트를 꽂고 보조 배터리 충전을 했다. 휴대폰도 그렇고 보조 배터리도 처음 구입했을 때처럼 한 번 충전하면 시간이 오래 가지 않고 빠르게 방전되어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해서 점하고 있는 애플사가 만든 아이폰이 운영시스템 업그레이드 시 배터리가 빨리 소진되어 소비자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해 과징금을 물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지구상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고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럼에도 유수의 세계적 기업이 계획적으로 제품 수명과 교체 주기를 짧게 하여 소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크나큰 해악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것은 해악이라기보다는 죄악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보행가가 동서로 뻗은 쓰허우지에(寺后街)와 만나는 지점에 성벽처럼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솟은 3층 건물 고루가 자리한다. 큰 북 두 개가 누각 문루 양쪽 옆에 자리한 고루 앞 건널목을 건너면 서점가(書店街)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군데군데 오래되거나 세련되게 단장된 크고 작은 서점들이 눈에 띄는 이 거리에는 음료와 간식거리를 파는 각종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데 젊은이들로 북적대어 활기가 넘친다.


행복카라는 커피와 차를 파는 테이크아웃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15분여를 기다렸다.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는 주문을 도와준 여고생 둘은 인근 상치우(商丘)에서 놀러 왔다고 한다. 계화(桂花) 향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한국인이라는 말에 신기해하는 이 친구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며 함께 인증 숏도 한 컷 남겼다. 서점가(書店街) 북쪽 출구로 빠져나와 시따지에(西大街)를 따라 청명상하원으로 향한다.


서점가(書店街) 먹거리 골목


청명상하원


상하이에서 자주 이용하던 파란색 공헝(公亨) 자전거가 보여 반갑다. 자전거를 지쳐 송도황성(宋都凰城) 관광구 호수를 낀 도로를 좌측으로 휘돌아서 청명상하원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북송의 화가 장택단이 12세기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東京, 별칭 汴京, 현 카이펑)의 청명절 모습을 담은 폭 24.8cm, 길이 528.7cm 크기의 그림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건물과 마을 등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한다.


매표소부터 관람객들이 넘쳐난다. 당초에는 그림 속 정취를 그대로 느껴볼 요량으로 청명절인 4월 5일에 맞추어 이곳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수많은 인파를 보니 당초 계획을 앞당겨 일찌감치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입장표를 사서 입구로 들어서니 청명상하도 그림을 큰 석벽에 새긴 부조가 맞이한다.


동경부두(东京码头)에는 유람객들을 태운 배들이 호수로 나아가거나 부두로 들어오고 있다.  호수 위 난간을 붉은색으로 칠한 홍교(虹桥)는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변하(汴河) 위에 걸린 폭이 넓은 다리를 재현해 놓은 것일 터이다. 다리 아래로는 배가 오가고 그 위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건너간다. 주말을 맞아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갇혀 지내던 갑갑함을 떨쳐버리려고 모두들 집을 뛰쳐나온 것일 터이다.


'청명상하도'를 그린 장택단 동상
청명상하도 속 홍교(虹桥)


홍교를 건너자 비파를 타는 대형 선녀상이 맞이하는 광장이 나온다. 어떤 가게 앞에서 훈제한 닭을 큰 칼로 썰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살코기 한 점을 건네며 맛보라고 한다. 암탉을 오리나 돼지고기 육수에 한약재와 향신료를 넣어 삶아낸 이 지역 고유의 요리 '통즈지(桶子鷄)'라고 하는데 짠맛이 강하다.


내친김에 점원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땅콩을 갈아서 만든 떡이라는 화셩까오(花生糕)도 한 조각 맛을 보았다. 때때로 황하가 범람하며 펼쳐 놓은 모래밭은 땅콩을 재배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호수와 운하 등 물이 많아 오리 사육에 적당한 강남 지역과는 달리 이곳이나 북경 등 북방 지역에서는 카오야(烤鴨 )등 오리로 만든 요리는 고급 음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여 점원은 카이펑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통즈지와 화셩까오를 함께 든다고 한다. 종이로 포장된 정사각형 모양의 화셩까오 한 덩이를 사들고 나왔다.


이처럼 관람객들로 넘쳐나는 모습은 900여 년 전 청명절 즈음 카이펑의 번화한 거리 모습과 흡사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카이펑의 진정한 번영은 운하가 개통된 후 조운의 중심지가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가 번영 발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중국 대운하 건설은 기원전 486년에 시작되었으며 수당(隋唐), 경항(京杭), 절동(浙东) 3개 대운하의 총 길이는 2700km로 베이징, 톈진, 허베이, 산둥, 허난, 안후이, 장쑤, 저장의 8개 성 및 직할시에 걸쳐 있다.


카이펑은 그중 수당 대운하의 가장 큰 수혜 도시가 되어 한 때 번영을 누렸으나, 오늘날엔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한 정저우에 성도(省都) 자리를 내어주고 일개 지방 도시로 밀려났으니 어느 나라나 도시든 흥망성쇠는 피해 갈 수는 없는 역사의 섭리인가 보다.


장택단의 걸작 <청명상하도>는 송나라 절정기인 휘종 때의 변하(汴河) 양안의 번화한 저잣거리와 교외의 자연을 정교하고 절륜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음식배달원, 구법승, 과거생, 수레 수리공, 뱃사람, 짐꾼, 일용직 노동자, 가마나 말 탄 사람, 거지, 점집, 찻집, 숙박업소, 수레, 술통 등 각종 직업군의 인간 군상과 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을 위해 계절에 따라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포공영빈(包公迎宾), 포공 순시 변하조운(包公巡视汴河漕运), 민속절화(民俗绝活), 악비창도소양왕(岳飞枪挑小梁王), 대송 동경보위전(大宋东京保卫战), 대송절기(大宋絶技) 등 무수히 많은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운 좋게도 포공영빈, 채찍 묘기와 잡기, 고전극 등 몇몇 공연의 일부를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한 관람객들 틈에 끼어 볼 수 있었다. 그중 축구장 넓이의 '교장(教场)'이라는 공간에서 마상 전투 장면을 실감 나게 펼치는 송나라 명장 악비의 무과시험 때의 고사를 재현한 '악비창도소양왕' 공연이 가히 압권이다.


북송의 이강(李纲), 종택(宗泽) 등 항전파 장수들과 군민이 금나라 군의 침략에 맞서 수도 동경(현 카이펑)을  방어하기 위해 치른 전투를 재현한 '대송 동경보위전(大宋东京保卫战)'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동 전투에서 송군은 금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쳤지만, 조정 내 휘종과 흠종 등을 필두로 한 타협파들로 인해 결국 보위전은 패하고 168년간 지속된 북송(960~1127년)은 멸망을 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악비창도소양왕(岳飞枪挑小梁王)' 공연(@photo 百度)


이곳에도 중국 여느 지역의 관광구와 마찬가지로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중국 역대 민간 인물 조각상 소품들을 전시한 '대박조상박물관(大朴造像博物馆)'과 각 시대별 기름등잔을 전시해 놓은 '상명고등박물관(常明古灯博物馆)'이 그것이다.


두 박물관에 진열된 갖가지 인물상을 비롯해서 백 가지 형상의 사자등, 연화등, 철등(铁灯), 석두 등(石头灯), 청화자등, 동물등, 벽등, 연유등, 쥐등 등등 모양, 연료, 재질 등에 따라 온갖 이름이 붙은 등(灯)을 보며 중국인들의 편집광적 유물 수집과 박물관에 대한 집착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해가 지면 시작되는 700여 명의 배우들이 참여해서 <청명상하도>와 <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을 기반으로 북송 왕조의 전성기를 그려낸다는 총 6막 4장의 '대송동경몽화(大宋·东京梦华)'를 관람하지 못한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절반쯤 기울 무렵 출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상하이로 돌아가는 열차 시각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어 자전거를 지쳐 대량문(大梁门)까지 가서 성벽을 둘러보았다. 대량문은 카이펑 고성의 서문으로 당나라 때인 781년에 세워졌고 북송 때는 '창합문(阊阖门)'으로도 불렸는데, 전쟁과 홍수로 파괴되어 철거되었다가 1998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풍요롭지만 때론 광포한 황화의 품에 안겨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도, 홍수로 땅 밑에 6개 왕조 도성이 층층 묻혀 있는 카이펑을 뒤로하고 북역에서 상하이행 고속철도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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