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나흘째 오락가락하고 있다. 주말을 끼고 벼르던 쟝시성(江西省) 징더쩐(景德镇)으로의 출행을 감행하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집 앞 정원의 자목련은 짓궂은 봄비와 꽃샘바람에도 가지마다 화사하게 만개한 꽃가지를 잘 간수하고 있다.
이번 출행의 개략적인 일정을 오후 늦게 상하이를 출발해서 자정 이전에 징더쩐에 도착, 호텔에서 일박, 그다음 날 박물관 관람 등 도자기 관련 탐방, 오후 7시 전후에 징더쩐을 출발해서 상하이로 귀환하는 것으로 잡았다.
홍챠오(虹桥) 기차역은 오늘도 예전처럼 인파로 넘쳐나지만 코로나19 음성확인 철차가 없어져서 역사 안 진입과 탑승 절차가 한결 수월해졌다.
시일이 촉박해서 출행을 결정하고 숙소와 기차표를 예약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목적지인 징더쩐의 가성비 좋은 호텔을 물색해서 외국인 투숙 가능여부를 확인하고 인터넷 예약을 마쳤다. 어떤 기준으로 외국인이 투숙할 수 있는 호텔을 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렴하고 위치도 둘러볼 곳과 멀지 않아서 예약한 호텔은 어떨지 궁금하다.
문제는 기차표 예약이었다. 기차표 예매 어플인 '취날(去哪儿)'과 '티에루(铁路) 12306'을 통해 예매를 시도했는데 직행 편은 시간이 맞지 않을뿐더러 유사한 일정의 표는 매진된 상태다. 우회하거나 환승하는 방법을 찾아서 "징더쩐(景德镇)-지우장(九江)-항저우(杭州)-상하이" 루트의 돌아오는기차표를 확보했다.
방금 쟈싱시(嘉兴市) 경계로 진입한 이 열차는 17:44에 상하이를 출발해서 징더쩐을 경유하여 지우장까지 가는 고속열차다. 상하이-지우장 구간 표는 남아 있는데, 그 중간에 거쳐가는 징더쩐까지 표가 매진 상태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50위안을 더 지불하고 징더쩐에서 하차할 요량으로 예매를 했었다. 한정된 수의 좌석을 볼모로 인민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중국 철도의 경영전략은 가히 천민자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해서 씁쓸하다.
빈 좌석 없이 만원인 열차가 예정된 시각에 어김없이 출발했다. 앞뒤 좌석의 남성 승객이 누군과와 나누는 전화 통화 소리는 소란하고 길게 이어진다. "옆 좌석 승객에게 불편을 주는 통화는 삼가고 전화는 객실 밖에서 해주세요"처럼 우리나라 고속열차에서 들을 수 있는 안내 방송은 들을 수 없다. 공공예절 수준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는 부분이다.
쟈싱과 항저우에서 한 번씩 정차한 고속열차는 '세계 잡화의 수도'로 알려진 이우(義烏), '금성과 직녀성(婺女) 두 별이 화려함을 다투는 곳'에 위치한다는 진화(金华), 저장 안후이 후베이 쟝시 네 성(省)에 인접하여 '사성통구(四省通衢)'로 불리는 취저우(衢州), 위샨(玉山) 등을 거치며 승객들을 태우거나 내려주며 서남쪽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질주한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도시 상라오(上饶)에 도착한 열차는 좌석 방향을 거꾸로 돌리고 빈자리를 채운 후 한참만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우위엔(婺源)을 거쳐 예정된 시각에 징더쩐 북역에 도착했다.
하차 후 역사를 막힘없이 빠져나오니 직통으로 연결된 택시 승강장은 지척인데, 잠시잠깐만에 내 뒤로 줄이 장사진처럼 길게 늘어섰다. 택시가 들어오는 통로에는 차를 세워둔 채 기사들이 승객들 가까이로 와서 무어라고 큰 소리를 치며 같은 방향의 합승객을 찾는다.
한참만에 내가 예약해 둔 호텔 방향으로 간다는 기사의 택시에 올랐다. 뒷좌석 승객은 택시에 오른 지 10분째 기다린다고 하는데, 기사는 남녀 동료 승객 둘을 더 데리고 와서야 출발을 했다. 시내 후미진 곳을 헤집으며 합승객들을 두 곳에 내려주고 호텔에 도착하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킨다.
체크인을 한 후에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좁은 도로와 오래된 주택과 상가 등이 어우러진 호텔 주변은 주민들이 송도 등 신도시로 빠져나가고 썰렁해진 인천의 구도심과 유사해 보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던 하루 여정을 맺고 달콤한 꿈을 청해 본다.
도자기 도시 속으로
일곱 시 반경 호텔을 나섰다. 여느 다른 도시의 주말 모습답지 않게 길거리에는 자동차, 오토바이, 행인 등으로 분주하다. 가까이에 있는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부터 둘러볼 요량인데 거쳐가는 길 지척에 있는 인민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주산대도(珠山大道) 도로변 청화백자 기둥의 가로등과 광장과 접해 있는 너른 보행로의 도자기를 빚거나 운반하는 도공들의 조상(雕像) 등이 도자기 도시의 중심이 와 있음을 실감케 해 준다. 거리에서 계단을 따라 사방이 수목으로 조성된 화단에 둘러싸인 석재 바닥의 광장으로 내려섰다.
여기저기 음악에 맞춰 광장무나 커플 댄스를 추거나, 배드민턴 등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굽은 허리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정겹게 얘기를 주고받는 등 많은 사람들이 주말 이른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 대부분은 족히 일흔이나 여든은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대다수다.
광장을 둘러싼 정원 한편에는 더러 꽃봉오리를 땅에 떨군 동백 고목이 가지마다 붉은 꽃봉오리로 한껏 치장하고 있다. 마치 노인들의 천국처럼 보이는 이 공원의 저 노파들도 찬란한 봄이 다 지나가기 전까지 저 동백처럼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마음속에 한 송이씩 품고 있을 것이다.
차도 옆에 자전거 등 이륜차 도로가 있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너른 인도로 이륜차가 통행하는 점이 특이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큰 도로의 곁가지로 좁고 깊은 농탕(弄堂) 골목이 나타나곤 한다. 육교 맞은편에 입구를 알리는 패루가 서있는 '소가농(蘇家弄)'도 그중 하나로 좁은 골목을 따라 100여 미터쯤 발을 들였다가 그 끝을 알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되돌아 나왔다.
교통편 사정으로 여행일정 짜기가 애매해서 찾지 못했던 징더전을 복잡한 루트를 엮어가며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각지 여러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을 둘러볼 때면 전시품 가운데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도자기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발한 것이다. 상하이 주변 수향 저우좡의 도자기점에서 자사로 빗은 붉은색 차주전자를 접하고 그 산지인 이싱(宜兴)을 찾았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중국의 도자기 제작 역사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에서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중국을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오래되었다. 기실 중국 도자기의 역사는 고대 상나라 때의 회유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 후 한나라 때의 녹유도기, 당나라 때의 당삼채를 거쳐, 송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원대에는 ‘도자의 길’이라는 해상 실크로드가 생겨나서 해외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곳 징더쩐에서는 한대(漢代)부터 도자기를 생산했고 송대(宋代) 경덕(景德, 1004-1007) 연간에 궁전에서 사용된 경덕진요(景德鎭窯)가 일약 명성을 얻게 되고 해외로 수출도 되었다고 한다. 이 어요창은 명 홍무 2년인 1369년에 창건되어 청나라 까지 542년간 존속했던 황실 도자기 제작 등을 관리하는 기구였다고 한다.
도자기로 인해 서구 여러 나라들이 동방 무역로를 찾아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다니, 지금의 반도체처럼 당시 징더쩐의 도자기 산업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고부가가치 산업이었던 셈이다.
어요창유적지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무료 예약 후 입장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600년 되었다는 어요 옛 우물('御窑古井')이 맞이한다. 그 오른편 지하 1층 깊이에 명대 도요지 관련 건축물 잔해와 도자기 파편 등 유적지를 발굴 보존해 놓았다.
그 옆 선자방(缮瓷坊) 전시실은 검사, 세척, 접착, 加古, 배보, 색깔 복구 등 깨어진 옛 도자기를 복구하는 절차와 방법, 사용된 도구, 사용된 재료 등을 사진과 글로써 잘 설명하고 있다.
남송 때의 청백유화 찻잔, 만청 시기 청화 찻잔과 금속 양식 주먹 크기의 차주전자, 명나라 때의 청화용문 주발과 홍운용문매병 등 복구된 유물들이 복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관람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왼편에는 명나라 중기의 가마 유적인 1500평방미터 넓이의 남록유지(南麓遗址)가 황실에서 사용된 자기를 생산하던 곳임을 증언하고 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가마공(窑工) 통빈(童宾, 1567-1599)의 사당인 '우도영사(佑陶靈祠)'가 자리한다. 통빈은 명 만력 연간(1573-1619)에 황궁이 용 항아리를 만들려다 굽는데 여러 번 실패하자 동빈이 강제로 가마에 던져진 후에야 비로소 성공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문득 아이를 넣고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에밀레 종, 즉 성덕대왕 신종에 관한 전설이 오버랩된다.
명 만력 이후 어기창의 동쪽에 통빈을 위한 사당을 지었고, 청나라 어요창은 물을 관장하는 진무(真武), 의(義)를 대표하는 관제(关帝)와 함께 그를 불을 관장하는 풍화선사(风火仙师)로 제사 지냈다고 한다. 징더쩐 도요인들에게 이들을 정신적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존장기활(存长气活)', '자국충혼(瓷国忠魂)', '요업신조(窯業神祖)', '풍화율사(風火傈師)' 등 글귀가 쓰인 현판 아래 도공 인물상들이 통빈(童宾) 조상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통빈의 전설은 흙과 물과 불을 사용해서 고도의 기술과 예술성을 쏟아부어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고 완성되는 도자기는 도공들의 땀과 열정뿐 아니라 신명을 바쳐야만 탄생되는 창조물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건물 전면 양쪽 벽면에 각각 여섯 마리 용이 부조된 어요공예박물관은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쳤다. 너른 공원 여기저기 보이는 관람객들 모습이 많이 늘어났다. 하늘은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렸지만 깊이 들이마시는 찬 공기는 가슴속으로 상쾌하게 밀려들며 가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호기심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공원 북서쪽 가장자리 얕은 언덕배기 완만한 계단 위에 4층 높이 용주각(龙珠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입구 양쪽 벽면에 이곳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외지로 실려 나갔을 징더전을 가로지르는 창강과 그 주변 거리 모습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족히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가 넘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도자기로 구워낸 그림이라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 내부 한가운데에는 청대 가마공장(어모창 도자촌) 축소 모형이 자리하고, 좌우편과 뒤쪽 문과 연결된 곁방 벽면에는 징더쩐을 가르 지르는 창허(昌河)의 동편과 서편 풍경화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강남 풍경을 담은 길쭉한 자기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 '남성유색(南城柳色)'이라는 표제가 붙은 도자 그림은 범선이 오가는 강가에 연초록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봄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쯤 이곳의 번성했던 시절의 모습을 어림짐작케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