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요박물관은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 맨 뒤쪽 용주각(龙珠阁)이 서있는 언덕배기 아래 평지에 자리한다. 1998년 11월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1,470점의 도자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벽과 천장이 반원형 곡선을 이루는 가마터를 여러 개 모아 놓은 형태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박물관 메인 건물 전면 좌측 화단처럼 조성한 공간에 물을 채웠는데, 수면에 비치는 박물관 건물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일견 뜨거운 가마터를 차가운 물로 식힌다는 건축가의 의도가 투영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징더쩐(경덕진)에는 한나라 때부터 도자기 가마가 있었고, 송나라 경덕(景德) 연간에 궁전 자기를 생산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명나라 때 어요(御窯)가 건조되면서 도자기 생산이 더욱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산(珠山) 황실 가마터에서는 명 태조 때의 도자기 건축 자재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는 장인과 감독관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도 있어, 당시에 황실 도자 생산자 실명 책임제가 실시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턱조차 없는 박물관 입구를 미끄러지듯 들어서면 '어요지광(御窑之光)' 주제관이 맞이한다. 지난 40년 동안 징더전 도자기 고고학 연구소는 명청 시기 황실 가마터에서 수 톤의 자기 조각을 발굴함으로써, 고대 도자 연구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가마형태 건물 사이 공간은 지붕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지하의 옛 도요 유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배치했다. 전시실의 설명문대로 명청 시기에 제작된 깨진 도자기 파편들과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각양각색 각종 용도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다.
길고 완만한 계단을 따라 지하 1층 전시실로 내려가면, 왕실 도자기의 진수를 모아 놓았다는 '어요지기(御窑之器)' 주제관이 나온다. 뛰어난 솜씨로 제작된 다양한 종류, 우아한 형태, 순수한 유약, 정교한 장식의 황실 가마 작품들은 도자기 제조 역사상 최고 수준의 성취라는 설명을 전시품들이 입증하고 있다.
건국과 더불어 외교 활동이 빈번했다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치세의 홍무(洪武, 1368-1398) 시기의 큰 사발과 접시는 이슬람 지역과의 공식 외교 활동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백유 자기는 곡선이 부드럽고 매끄러워 제3대 황제 영락제 치세(1402-1424) 때의 가마 소성 성과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평가된다. 귀뚜라미를 좋아했다는 제5대 선덕제(宣德帝, 치세 1425∼1435) 때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귀뚜라미 항아리 도자제품들이 이채롭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다양한 꽃병들은 주로 명 정통 천순(正統 天順, 1435-1464)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한다. 꽃을 꽂은 도자제 화병, 잔, 향로, 향 상자 등이 함께 배치된 당시의 궁중화들이 그 시기 불교, 도교, 조상 숭배 등 제례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고 한다.
주견심(朱見深, 1447-1487)은 어린 왕세자 때 폐위된 불행한 경험으로 나약하고 내성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인 성화(成化, 1465-1487) 연간에는 섬세 단아 청신한 청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홍치제(弘治帝, 1488-1505) 때는 대담한 황색 안료의 접시와 그릇 등 황유 자기가 황제와 황후의 일상용품이나 제물로서 엄격한 통제하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정덕(正德, 1506-1521) 연간은 관심과 미적 취향이 바뀐 사회 분위기로 인해, 황실 가마 도자기의 모양과 유약 색상이 손실되는 시기라는 평가이다.
황제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어요창에서 생산된 도자기의 형태 또한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청와대에서도 취임식, 정상회담, 올림픽 등 중요 행사의 만찬주나 공식 술로 국산 주류를 선정해서 사용해 왔다. 청와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술도 바뀌어 왔는데, 그중에는 매취, 문배주, '강서 마일드 에일' 수제 맥주, 청도 '감그린 아이스 와인', 충북 영동산 와인, 단양 대강 막걸리 등이 있다.
밀짚모자를 쓰고 청와대 만찬주였던 '소백산 대강막걸리'를 걸치던 노무현 대통령이나, 농군들과 논두렁에 앉아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에서는 친근감과 존경심이 우러난다. 이는 한때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술이었던 막걸리에 대한 막걸리 세대들만의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침청유(一枕清幽)'라는 설명문 옆에는 각종 도자제 베개들이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송원(宋元) 시대에 유행했지만, 명 어요에서는 거의 구워지지 않았던 도자 베개 10개가 2014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꽃무늬의 정통 청색 및 흰색의 이 베개를 "여름에 선풍기를 돌리지 않고 겨울에 아궁이 근처에 가지 않는다"는 명나라 6, 8대 두 차례 황제였던 천순제 영종의 생활 습관과 연관 짓는 해석도 있다.
지하 1층 야외 통로를 통해 '청화 특별전시관'으로 들어가서, 상주위진남북조 수당송원명(商周魏晉南北朝 隋唐宋元明)까지의 중국 고대 도자기 변천 연표, 자기의 원료가 되는 순백색의 고령토 샘플, 이곳 징더쩐의 자기 생산 역사, 명나라 때의 자기 교역로, 동영상 예술을 활용한 도자기 표면 문양 설명 등의 전시물을 살펴보았다.
어요창 공원의 오른편 담장의 낮은 문으로 나서면, 도요 가옥들이 빼곡히 자리했었다는 좁은 영상농(迎祥弄) 골목이다. 그중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청대에 지은 170년 역사의 읍산요(邑山窑) 주택은 사방을 둘러싼 건물 가운데 공간이 하늘로 뚫린 형태로, 각종 자기들이 건물 내부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그 옆 서가요(徐家窑)는 청화, 균홍(均红) 등의 자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1979년 문을 닫았다가, 2013년 복구하여 생산을 재개했다고 한다.
어요창 공원을 뒤로하고 영상농 맞은편 팽가상농(彭家上弄)을 따라중산북로(中山北路)로 향했다. 이 골목에도 청나라 중기에 건립되어 1979년까지 가마의 불이 타올랐다는 황노대요(黄老大窑), 청 말부터 1962년까지 자기를 생산했다는 유가요(刘家窑) 등 옛 도요 제작 가옥들과 창양서원 등 교육시설들이 높은 담장의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따라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중산북로를 따라 북쪽의 어요경항(御窑景巷) 경관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요경항(御窯景巷)' 경구(景区) 남쪽 가장자리 중산북로의 '안칭 훈툰관(安庆馄饨馆)' 간판이 붙은 노변 식당에서 볶음밥과 훈툰을 한 그릇씩 시켜 이른 점심으로 허허로운 배를 채웠다. 밥값은 십오 위안으로 상하이의 비슷한 로컬 식당에 비해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징더쩐의 생활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어요경항 경구는 구시가지 북부 창강 연안의 남쪽 중도구(中渡口)에서 중산북로(中山北路)를 따라 북쪽 자도 대교(瓷都大桥)까지 약 1.1km에 걸쳐 있는 약 3.1ha에 달하는 구역이다.
이곳은 송나라 때부터 명나라 초까지 도자기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 명청 시대에는 수송과 물자의 집산지로서 무역, 인구, 문화가 가장 번화한 곳으로, 도자기로서 세계에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108개의 농(弄, 주거지 골목)이 있었는데, 현재는 20여 개가 남아 있고, 선착장, 상점, 민가, 연극무대, 회관, 교당 등 역사적 건축물과 무형문화재가 다수 남아 있고 자기 공예, 민속풍정 등 무형문화가 전승되고 있다는 안내문의 설명이다.
중산북로 도로변은 오래되어 낡고 퇴락한 건물들이 옛 영화를 되새김질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간중간 수리한 옛 건물에 커피숍, 호텔, 웨딩숍 등이 몇몇 눈에 띈다.
창강과 너른 둔치를 내려다보며 성곽처럼 축조된 높은 보행로를 따라 걷자니,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중산북로는 왼편에 창강을 끼고 북쪽으로 뻗어가면서, 오른편으로 좁고 깊숙한 골목, 즉 농(弄)이나 항(巷)을 여러 개 거느리고 있다.
용선농(龙船弄)의 양팔을 뻗으면 닿을 듯 좁고 깊이 뻗어 들어간 골목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허물어지고 이지러진 폐가들이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다. 필시 퇴락했지만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깊은 창고에 쌓아둔 것처럼,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 사이 몇몇 가옥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지, 골목에서 간간이 주민들이 눈에 띄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활기차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그들만의 아지트처럼 그들은 포근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칠 년 전 인천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밤산책 삼아 둘러보던 퇴락한 인천의 구도심과 흡사해 보인다.
명나라 때 요 씨 상인이 길 입구에 쌀가게를 차렸기 때문에 '하요가농(下姚家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은 폭 1.6m에 길이가 190m나 된다고 한다. 그 옆 조양항(朝阳巷), 석사부농(石獅埠弄), 상단포농(上当铺弄) 등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가고 적막감이 감도는 낡고 누추한 모습은 매 한 가지다.
옥자항(玉字巷) 골목 입구 옆에 '대순포호(大顺布號)'라는 포업을 하던 휘주 상인 즉 휘상(徽商)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복층의 작은 전시관이 자리한다.
징더쩐의 비단 산업은 200여 년간 이어졌는데, 줄곧 휘상들이 독점적 위치를 점했는데, 1920년대 중반에는 60여 개, 1930년대 초에는 75개의 포목점이 있었다고 고증한다. 주로 비단, 모직물, 면직물과 다양한 색깔의 손으로 짠 무명천 등을 취급했는데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후베이 등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다고 한다.
어요경항 구역 안에 자리한 '징더쩐 옛 도시 박물관(景德镇老城博物馆)'으로 발을 들였다. 박물관 입구에 안내원은 방문객을 힐끗 한 번 쳐다볼 뿐 무료한 듯 의자에 앉힌 몸을 뒤로 젖힌다.
송나라 진종(真宗)이 징더쩐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 전까지, 이곳 옛 도심은 '창난쩐(昌南镇)' 또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지형으로 인해 '타오양(陶阳)'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박물관은 '도양십삼리(陶阳十三里)', '공장팔방래(工匠八方来)', '기성천하주(器成天下走)', '노가구 원경(老街区愿景)' 등 네 개의 주제로 천년 자도(瓷都)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노가구 원경' 전시실에는 길 건너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옥자항(玉子巷) 골목의 옛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틀어주고 있다. 영상 속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이웃 주민들끼리 모여 담소하는 모습 등이 정겨워 보인다.
인파로 들끓었을 옛 번성기와는 달리, 인적이 드문 쓸쓸한 거리와 마찬가지로 넓은 박물관에도 관람객은 한둘뿐으로 썰렁하다. 수박 겉핥기 하듯 전시물들을 대충대충 훑어보고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다시 중산북로 나서서 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왕묘희대(五王庙戏台)' 건물이 나온다. 명말 청초 징더전 도자기의 전성기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문화적 욕구가 증가하면서 지어진 고대 극장이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恒産恒心)"는 맹자의 말처럼, 생활이 풍족하면 바른 마음을 견지할 수 있고 즐길거리도 찾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듯싶다.
희대는 높은 겹기와지붕에 화려한 목각 장식으로 치장된 건물로, 그 앞 공터와 희대 전면과 좌우의 복층 누택(楼宅)에서 관람을 할 수 있는 구조다. 매년 단오, 중추절, 춘절 등 명절에는 각 도자기 업계의 큰 사장들이 대형 극단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각자의 재력과 권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마침 중년 여성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오르며, '경덕진시 2023년 희곡 특별 공연(专场展演)' 시작을 알린다. 관객은 부근 아주머니들과 거리를 지나던 행인 등 열두서너 명에 불과하다.
젊은 여인으로 분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배우들이 간드러진 음악과 노랫가락에 맞추어 느릿느릿하지만 끊김 없는 동작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어느덧 동서로 뻗은 창강대도(昌江大道)와 중산북로가 교차하는 어요경항(御窑景巷)의 북단까지 왔다. 그 부근 웨딩숍 유리창 너머로 눈에 띄는 젊은 여점원의 도움을 받아서 택시 호출 어플인 '띠디(滴滴)'로 택시를 불렀다. 당일치기나 마찬가지인 짧은 일정이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 한 곳을 골라서 둘러볼 요량이다.
당초 점원이 추천해 '도계천 창의광장(陶溪川创意广场)'으로 향하다가 택시기사의 권유로 방향을 도자시장으로 바꾸었다. '징더전 조삭자창(景德镇 彫削瓷廠)'이라는 패루 앞에서 택시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섰다.
정자 누각이 있는 작은 언덕을 끼고 남북으로 뻗은 골목을 따라 좌우로 도자기 상점, 도자 공방, 카페 등이 오밀조밀 자리한 이곳은 그 명칭("乐天陶社周六创意市集")처럼 토요일 오전에만 노상(路商)이 열린다고 한다.
점포가 없는 요업 종사자들이 토요일마다 이곳 언덕 주변, 골목 공터, 도로변 등에 자신들의 가마에서 직접 생산한 도자 제품들을 펼쳐 넣고 판매를 하는 생업의 현장인 것이다. 오후라 그런지 북적였을 골목은 다소 한산해 보이고 펼쳤던 좌판들을 거두어들이는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중년의 장인이 도토(陶土)로 관공(关公)의 두상을 빚고 있는 공방을 지나서 주산대도시장 북단으로 빠져나가려고 (珠山大道)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낡은 건물 2층에 들어선 '란파이(蓝 π)'라는 카페의 계단을 올라 그 뒤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낡은 창문으로 차를 들며 담소하는 젊은 남녀들 모습이 내비치는 골목길 낡은 담벼락 아래 도자제품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이 눈에 띈다. 한 평 남짓 넓이 깔개 위에 컵, 주전자, 숟가락, 동물 모형 등 앙증맞은 소품들이 놓여 있고, 둥근 챙 모자에 얼굴이 반쯤 가린 여성은 두 손으로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앳된 모습에 "학생이냐"라고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도공이라고 대답한다. 후난성 헝양(衡阳)이 고향이라는 이 젊은 여성은 무슨 연유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천 리나 떨어진 징더쩐의 후미진 이 골목에 앉아 있는 것일까.
시장의 좌판이나 공방의 도예가들과 그녀의 모습에서 문득 몽마르트르 언덕 거리의 화가들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그 젊은 여성 도예가의 성공을 기원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박물관 속에 진열된 옛 유물들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 도자 도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상하이로의 귀로에 오른다. 2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