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두고 '미래설계 과정' 교육차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날아왔다. 제주도는 네 해 전 12월에 한라산 당일치기 산행을 위해 방문한 이후 4년 만의 방문이다.
제주공항에서 교육관에 도착해서 짐을 내리고 밖으로 나오니 한두 방울 뿌리던 비는 어느새 멎었다. 오후 다섯 시경에 교육관을 나서서 민오름으로 향했다. 부근에 제주특별자치도청, 도 의회, 도 교육청 제주경찰서, MBC제주 지사 등 주요 관공서 건물들이 눈에 띈다.
도청 제2청사 앞을 지나 연오로(連吾路)를 따라 남쪽으로 직진했다. 연북로를 건너서 코스 안내도가 있는 입구로 들어서서 정상 쪽 코스를 잡았다. 오름 정상 쪽으로 나무데크 계단길이 잘 놓여 있다.
민오름 오르는 길
오름은 기생화산 또는 측화산의 제주도 방언으로 산 또는 봉우리를 뜻한다. 제주도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 전역에 걸쳐 37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한다. 하루에 하나씩만 오른다고 해도 모두 다 올라볼면 족히 일 년이 걸린다는 얘기다. 말굽형, 원추형, 원형, 복합형 등 오름의 여러 형태 가운데 이곳 민오름은 분화구에서 용암이 낮은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진 민오름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민오름 들머리의 안내판이 오름에 얽힌 사연을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민오름은 연미마을과 정실마을 사이에 위치한 표고 251m인 말발굽형 화구를 품은 오름이다. 지금은 숲이 울창하지만 4.3 당시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오름이었다. 민오름 중턱에는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하다가 희생된 동굴 터가 있다.
민오름은 제주 4.3 당시 유일한 동영상인 '제주도 메이데이'에 선명하게 등장한다.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당하여 끌려온 곳이 바로 이 민오름이다. 두 여인 중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부지했지만, 나머지 한 여인은 끝내 희생을 당했다."
민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 시내
제주 돌담과 무화과
녹음 무성한 숲 사이사이 아름드리 노송이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 계단길 옆에 비석 하나에 좌우 나란히 쌍분이 낮은 돌담 테두리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전형적인 제주도 지역 무덤이다. 그 기슭에 터를 잡고 화전을 일구고 목축을 하는 등 삶의 근거지였던 오름은 죽어서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있으니 이곳 사람들과 떨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오름이지 싶다.
양팔 넓이 나무계단이 반듯하게 오름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계단 옆은 폭신해 보이는 흙길이다. 땅속 깊이에는 우리들 젊은 날의 뜨겁던 심장처럼 한때 불덩이가 되어 분출되던 마그마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해발 200미터 지점 숲에 둘러싸인 너른 터에 체력단련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부터 나무계단 길은 경사가 족히 45도가 넘을 듯한 널찍한 벽돌계단 길로 바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새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노래하고, 그 가운데 장단 맞추듯 장끼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숲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제주 시내는 아득히 발아래에 있다. 옅은 바람에 라일락꽃 향기처럼 달콤한 향기가 실려왔고, 이내 가파른 계단 길이 2층 정자가 자리한 너른 정상을 내놓았다.
전망대를 겸한 정자 위로 올라 툭 트인 사방을 조망했다. 남쪽으로 병품처럼 긴 능선을 펼친 한라산이 구름을 잔뜩 머리에 이고 있다. 산자락에는 희디흰 구름이 산정으로 오르려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멈추어 서있다. 북쪽 방향으로는 제주시의 전원풍 낮은 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바다 쪽으로 길게 내뻗은 국제여객터미널의 긴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희뿌연 바다는 구름이 드리운 하늘과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어 수평선을 가늠할 수 없다.
오름 정상 주변의 여러 방향 산책로 중 하나로 접어들었다. 북동쪽 방향으로 내려서서 오름 기슭 가장자리를 끼고 들머리 쪽으로 돌아갈 요량이다. 콧속으로 파고들던 향기로운 내음의 주인공은 산책로 주변에 간간이 서 있는 아름드리 정향나무였다.
제주 전통 형식 무덤
어우늘 마을 소개비/조설대 비석과 땅채송화
오름 가장자리로 내려설 즈음 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에 우산을 펴 들고 오름 숲에서 꾹꾹 울음 우는 산비둘기 소리를 들으며 오름 북단 가장자리 민오름길을 따라 걸었다. 길 옆에 '면암 유배길'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태인에서 74세 나이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게 잡혀 대마도에 감금된 후, 단식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제주도로 유배되었던 사유가 궁금하다.
연북로를 건너 조설대로 향했다. 그 중간에서 세 그루 느티나무 아래 '잃어버린 마을'로 알려진 '어우늘' 마을에 대해 소개하는 돌비석이 눈레 띄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주 4.3 사건 당시 소개령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로, 23 가구 9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이 마을은 한학자 진옹 이응호 선생이 거주하며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 이름은 '임금의 은혜를 입은 고을'이라 하여 어은흘(御恩屹)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인적이 없는 돌담길을 돌아 조설대에 닿았다. 오라동에 자리한 '조설대'에 대한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조설대(朝雪臺)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체결 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이응호(李膺鎬)를 중심으로 12인의 소장과 유림들이 '집의계(集義契)'란 모임을 결성하고, 이곳에 모여 항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朝雪臺'를 음각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朝)의 수치를 설욕(雪)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집의계의 대표와 활약한 이응호의 <탁라국서(乇羅國書)>와 계원이었던 김석익의 <탐라기년(耽羅記年)>은 민족혼을 일깨우고 지키려는 뜻이 담긴 저서이다. 마을 고로들의 구전에 의하면,이곳 조설대는 조선 중엽 이후 국상을 당하였을 시 리민들이 모여 곡하던 망곡(望哭)의 터로도 알려져 있다."
제주도 돌담과 이 지역 전통 대문인 정낭
종아리 높이 소담한 돌담길이 감귤밭 밭두렁을 대신하고 있는 골목길을 지나서, 마음속으로 오라마을을 가로질러 교육관 쪽으로 향하는 길을 그렸다. 오라동 마을회관 앞에서는 4.3 사건 당시 '오라동 방화사건'에 대한 설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4.3 무장봉기가 일어난 이후 무장대와 경찰에게 각각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인명 희생 사건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4월 29일에는 오라리 마을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들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4월 30일에는 동서간인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되었는데, 두 여인 중 한 명은 맞아서 죽고 한 명은 탈출하여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렸습니다.
5월 1일 오라리에서는 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9시경 전날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오전 마을 부근에서 열렸던 장례식에는 3~4명의 경찰과 서청/대청 단원 30명이 참석했습니다. 매장이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을 태우고 떠났고,청년단원들은 그대로 남아 집들을 찾아다니며 12채의 민가에 불을 질렀습니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난 오후 1시경, 무장대 20명가량이 총과 죽창을 들고 청년들을 추격했습니다. 급히 피했던 터라 청년단의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 시각을 전후해 마을 어귀에서 이 마을 출신 경찰관의 어머니가 피살되었습니다.
4.3 봉기기 일어난 이후 진행 중이던 평화협상은 이 방화사건으로 결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이 강경 진압작전을 전개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 만약에 오라동 방화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협상이 내용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7년 7개월의 고통의 세월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미국의 기록영화로 그때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데, 미군 촬영반에 의해서 입체적으로 촬영이 된 이 영화에서는 미군 비행기를 타고서 마을 공중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라리로 진입하는 경찰 기동대의 모습도 함께 촬영되었습니다."
자투리 시간에 민오름을 찾아 4.3 사건에 휩쓸린 민오름과 오라리 마을의 비극적 역사의 단면을 마주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