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공룡의 등을 타다!

설악산 무박이일 산행

by 꿈꾸는 시시포스

밤은 열한 시가 지나고 자정으로 향한다. 자정 녘 복정역, 45인승 산행 차량 한 대가 산객을 가득 채우고 떠난 후 뒤이어 도착한 두 번째 버스에 올랐다.

금요일 밤 출발하는 무박이일 설악산행 버스의 여유 좌석이 있다는 W산악회에 한 자리를 예약했다. 친구들과 일정을 맞추지 못했지만 오월이 가기 전에 설악의 백미인 공룡능선을 보고 싶었다.

일상을 벗어나 무박이일 설악 품으로


무박 산행, 더구나 단독으로 하는 원행지 산행은 처음이다. 십중팔구 시간 코스 등 시시각각 산행의 세세한 부분을 홀로 판단하면서 고독을 친구 삼아 걷는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반면,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오롯이 혼자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며 걷는 등 여러 잇 점도 있을 것이다.


한 시 반 경 도착한 설악휴게소, 지붕 위에 하현달이 걸린 그 휴게소 너른 주차장에는 앞서 도착한 버스 한 대만 서 있을 뿐 한산하다. 우리 버스에 이어 산객을 실은 버스가 너 댓 대 더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산객들은 신선한 바람을 쐬고 굳었던 몸을 풀고 삼삼오오 모여 식당에서 이른 아침으로 에너지를 비축하기도 한다.

휴게소의 슈퍼 주인은 최근 산행 버스 수가 많이 줄었단다. "이민을 가던지 해야지..." 푸념인 듯 내뱉으며 경기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단다. 요즘 설악을 찾는 사람도 많이 줄어 버스 한 대에 여러 산악회 산객을 함께 태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타고 온 버스의 산행대장도 다른 산악회 소속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잠시나마 세상을 탈출하려 지친 몸을 이끌고 한밤을 달려 설악으로 오는 사람들이나 이민이라도 가는 게 낫겠다던 슈퍼 주인의 마음은 매 한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세상 어디로 간들 인생사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던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1799~1837)의 시가 위안이 될까? 고리키가 그의 문학을 가리켜 '시작의 시작'이라 했던 그의 삶도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휴게소를 출발한 버스는 44번 국도를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 장수대와 한계령에서 각각 일단의 산객을 내려주고 나머지 산객들을 오색에 풀어놓았다.

전국 각지의 산객을 태우고 온 버스가 도로변을 가득 메운 오색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앞은 산객들이 잠시 후 세 시에 열릴 입구 주변에서 산행 채비에 분주하다. 누군가 들뜬 마음에 화장실에 놓고 갔을 스마트 폰을 지원센터에 맡기고 어둠에 잠겨있는 설악의 품으로 들어섰다.

오색은 설악 최고봉인 대청봉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의 출발점으로 종주 산행을 하려는 산객들이 밤을 달려 몰려든다. 정상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는 약 5km 구간은 경사가 가팔라서 결코 녹록지 않은 여정이다.

초입부터 앞뒤로 늘어선 산객들의 긴 행렬은 어둠에 덮인 산길을 따라 이어지고 발자국 소리, 스틱이 바닥을 치는 소리, 몰아쉬는 숨소리와 함께 무슨 시름인지 잠 못 드는 휘파람새의 휘이 휘이 울음이 그치지 않고 산객을 따라온다.

설악의 새벽 휘파람새는 잠 못 들고


나무데크 돌계단 흙길이 이어지는 길은 가파르고 힘겹다. 제1쉼터를 비롯 산행로 옆에 간간이 나타나는 작은 공터들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짧은 휴식을 하는 산객들로 빈 공간이 없다.

대청봉 아래 1.8km 지점 설악폭포가 가까워지자 어디서부턴가 알게 모르게 오른편으로 슬며시 다가섰던 계곡 물소리가 점점 커지며 더욱 우렁차게 들려온다.

폭포 물소리가 뒤에서 희미해질 즈음 가파른 길 왼편으로 끝청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편 능선 위로 트인 하늘에는 여전히 하현달이 밝다. 조팝나무 얼레지 개별꽃 노랑제비꽃 등이 어둠이 걷힌 산길 옆에서 수줍게 산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대청봉이 가까워 올 무렵 날은 이미 밝았다. 뒤돌아보니 멀리 겹겹이 늘어선 산들이 구름에 묻혀 밀려오는 파도처럼 능선만 드러내고 있다.


바위로 덮인 대청봉에는 산객들이 빼곡하다. 해발 1708미터 정상 표지석 앞 인증숏을 챙기려는 산객들의 긴 줄을 따라 기다리던 인내심은 주변 장관에 끌리는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북쪽의 중청과 소청에서 이어지는 공룡능선 오른편으로 멀리 울산바위가 또렷하다. 그 너머 해변 쪽으로 뚝 떨어져 앉은 운봉산과 동해안까지도 시야가 툭 트였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설악을 대면했던 기억이 새롭다.

천불동 계곡 오른편 화채능선 너머 동해로 흘러드는 쌍천 하구에 반사되는 태양 빛이 강렬하다. 남서쪽 사면엔 진분홍 털진달래가 멀리 구름과 어우러진 검푸른 빛 산군들과 대조를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있다.


삼삼오오 모여 아침을 드는 산객들이 빼곡한 중청 대피소 부근에서 배낭을 열고 허기를 달랬다. 중청을 비껴지나 소청에서 봉정암과 희운각 대피소로 길이 갈린다.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고도 차이가 400여 미터로 급전직하 돌계단의 연속이다. 가파른 그 길을 오르고 내리는 산객들 중엔 프랑스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공룡의 등줄기에 올라타다


대피소에는 라면과 반찬 등을 늘어놓고 아침을 들거나 얘기를 주고받는 산객들로 빼곡하다. 멀지 않은 무너미 고개에서 천불동 계곡과 공룡능선으로 길이 갈린다. 왼편으로 길을 잡으며 공룡능선의 경계로 들어섰다.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워진 듯 피로가 밀려들고 "공룡능선은 8시 이전에 들어서야 픽업 시간에 맞출 수 있다."는 산행대장의 말은 자꾸 귀에 걸린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으니 체력소모를 최대한 줄이며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신선대 좌측을 비껴 돌면 내려앉은 능선 너머로 노인봉, 1275봉, 천화대, 범봉, 나한봉, 세존봉, 황철봉 등 북쪽으로 이어지는 공룡능선 산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를 바람은 능선 아래 나무 가지와 잎을 흔들고 암벽에 부딪히며 매섭게 몰아친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훔쳐낸 수건은 이미 흥건히 젖어 세찬 바람이 더없이 고맙고, 공룡의 품으로 들어선 것을 격하게 맞아주는 듯도 싶다. 푹 내려앉은 깊은 능선을 지나고 밧줄을 잡고 가파른 암벽도 기어오르는 길, 팔다리 할 것 없이 몸에는 조금의 허세도 남아있지 않고 마음도 힘들다는 생각뿐 잡념이나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암봉 아래 좁고 험한 암벽 사이를 지나고 벼랑을 오르내리는 공룡능선 구간 곳곳은 천하에 둘도 없을 비경들을 선사한다. 시시각각 바뀌는 그 모습은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듯싶다. 비경에 취하면서도 학을 떼듯 서둘러 벗어나기를 바라던 공룡능선 구간은 노인봉, 1275봉, 촛대바위, 나한봉을 지나고 마등령에 닿으면서 끝이 난다.


지난봄에 올랐던 영남 알프스는 운문 가지 신불 영축 등 1천 미터가 넘는 아홉 산군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인데, 설악의 공룡능선 4.5km는 모든 구간이 해발 일천 미터가 넘고 곳곳 장관을 펼쳐 보인다. 가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이라는 어느 산악 전문 잡지가 밝힌 설문 결과를 의심할 까닭이 없지 싶다.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하산하는 길 대신 오세암 쪽을 택한 것이 너무 잘했다 싶다. 필시 산객들과 밋밋하게 스쳐 지날 뿐인 비선대 쪽과는 달리 이쪽은 오세암을 찾는 보살 처사님들과 마주치며 한 두 마디나마 얘기를 주고받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백담사야 찻길이 열려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겠지만, 영시암과 만만찮은 능선을 몇 개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오세암이나 소청 아래 암봉 밑 위태한 곳에 독수리 둥지처럼 자리한 봉정암은 불자라도 웬만한 신심이 없으면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비경 속 암자를 찾는 순례자 발길은 끊이지 않고


그럼에도 이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건장한 청장년이 아니라 대부분 노령의 보살님들이다. 재작년 이맘때쯤 봉정암에서 오세암과 영시암으로 내려오는 길에도 공양물이 든 바랑을 메고 산비탈을 힘겹게 오르는 노 보살님들을 많이 스쳐 지났었다.


때론 사진을 부탁하면 찍어드리고, 할머니에겐 힘내라는 가벼운 격려의 말도 해드리고, 거리를 묻는 분들에게는 대강의 거리와 소요시간도 알려주기도 했다.


영시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한 젊은이에게 '아휴- 힘들죠!'라고 말을 건네자 빙긋이 웃는다. 살아가는 것이 곧 고행이요, 어느 시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으니, 그는 빙긋 미소로 산행이 힘들다는 말을 대신했을 터이다.

이 년 만에 다시 들른 오세암에서는 그때처럼 공양시간이라 그때처럼 누구에게나 열어 놓은 큰 밥솥의 쌀밥과 미역국을 사발에 말아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드니 텅 빈 허기가 그득 차는 듯하다. 계단을 따라 동자전으로 올라 합장하고 서둘러 영시암으로 향했다.

용대리에서의 픽업 시간에 잘 맞출 수 있을지 남아있는 거리와 시간의 상관관계 로직으로 복잡해진 머리가 발길을 재촉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시간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인가?


"혼자 왔나요?"
"예, 그래서 좀 심심했지요."
"인생은 어차피 혼자인걸요."
"..."


영시암 쪽에서 오세암으로 향하던 어떤 스님과 나눈 짧은 대화도 불가에서는 인연이라 여길까? 고성에서 다녀가려 발길을 옮겼다며 근처 오면 한 번 들르라고 연락처도 건넨다.

오세암에서 2.5km 영시암까지 거리가 그 몇 배로 느껴진다. 예전처럼 산객들과 불자들로 붐비는 영시암을 서둘러 지나고 백담사로 향한다. 좌측에 백담계곡을 끼고 걷는 끝날 줄 모르게 지루하게 느껴지던 3.5km 길이 끝나고 백담사에 도착하면서 길고 힘들었던 산행을 마무리한다.

산행을 마치며, 가까이 다가서니 그 속살까지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멀리서 조망만 해도 좋을 산, 두 번 다시 오지 말아야지, 했던 생각들은 이내 사라지고 벌써 아쉬운 마음이 인다.

백담사와 용대리를 오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위태한 계곡 옆 도로를 따라 설악의 품을 벗어났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둘러 지나온 공룡능선을 언젠가 다시 찾아 느긋하게 거닐기를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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