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알랭 드 보통의 책 『공항에서 일주일』 중
지난 토요일, 인천공항에 다녀왔다. 아내가 캐나다 캘거리로 둘째 처형 댁을 방문하러 출국하는 날이었다. 아내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은 한때 내가 근무했던 곳이다. 익숙한 공간, 오래 입어 편안해진 옷처럼 정겹고도 담담한 그 장소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예전의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해외여행이 익숙해진 요즘, 공항은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오가며 일상처럼 드나드는 곳이다. 그럼에도, 공항은 여전히 어떤 감정의 경계선에 놓인 장소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설렘에 들떠 떠나고, 누군가는 아쉬움 속에서 배웅하며, 또 누군가는 간절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곳은 감정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그래서 공항은 우리 일상 속에서 낯선 감정과 만나는 가장 비일상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결혼 후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집을 비운 시간은 적지 않았다. 지방 발령으로 주말부부 생활을 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두 해 반을 주재원으로 홀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가 집을 비우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항공사 카운터에서 수하물을 부치고 티켓팅을 마친 뒤, 공항 내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함께했다. 그리고 출국장 앞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다녀와요.’ 짧은 인사 속에 긴 마음이 묻어 있었다. 떠나는 건 익숙한 일인데, 떠나보내는 건 어쩐지 낯설었다.
그날, 문득 책장 한편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에 생각이 닿았다. 알랭 드 보통 이 쓴 『공항에서 일주일을(A week at the Airport_A Heathrow Diary)』이라는 책이다.
2009년 여름, 런던 히드로 공항은 한 철학자를 초대하여, 그에게 공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한다. 여행자들로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히드로 공항 제5터미널에서, 그는 일주일 동안 ‘공항 작가’로 머물며 공항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고 철학적으로 해부해 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이 프로젝트에 응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늘 "우리 삶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간과 행동들에 철학을 입히고 싶다"라고 말해왔고, 공항이라는 공간은 그에게 더없이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민족과 계층의 여행자들, 수하물 담당자, 비행기 조종사, 공항 교회의 목사, 청소부, 구두닦이, 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수첩은 상실, 욕망, 기대의 일화들, 하늘로 날아가는 여행자들의 영혼의 스냅사진들로 점점 두꺼워졌다."
감정의 경계선이자 지리적, 심리적 이동이 교차하는 곳, 누군가는 환희에 차서 도착하고, 또 다른 이는 고독과 긴장 속에서 이륙을 준비한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표정, 탑승 게이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 비행 안내 방송을 반복하는 승무원의 눈빛. 작가는 그 짧은 장면들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내면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한편, 보통은 구두를 닦는 더들리처럼 공항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그들의 내면을 관찰한다. 그런가 하면 환전소의 각국의 화폐 다발을 보면서, 그럴듯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이 아무 때나 구두를 닦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과거 밑에 줄을 긋고 싶을 때, 외적인 변화가 내적인 변화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을 때 구두를 닦는다."
"가지각색의 색깔과 글자체로 이루어진 이 지폐들은 지도자, 독재자, 창건자, 바나나 나무, 작은 요정들로 장식되어 있다. 예멘에서 낙타를 사거나 페루에서 안장을 살 때 지불되기도 했고, 나폴리의 나이 든 이발사의 지갑이나 몰도바 초등학생의 베개 밑에 들어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보통은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백분 활용해서 공항 내 곳곳을 훑으며,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은 관찰자로서 사유의 만담을 쏟아 낸다.
여행자에게 있어 공항은 그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고 모두가 거쳐가는 현대인의 일상적 장소이지만, 그 경계를 통과하며 존재의 목적과 존재의 방식을 묻는 영역이기도 하다. '비행'을 앞두고 어디론가 가려고 거쳐가는 그 순간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보다 ‘왜 가는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
"네 집을 단정하게 정돈하라,
네가 죽을 날,
이제 살아 있지 않을 날에 대비해서.
비행이라는 의식은 겉으로는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이 비종교적인 시대에도 여전히 실존이라는 중요한 주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만난 일상의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이치를 관조하는 관찰자요, 그들의 얘기를 전하는 훌륭한 통역자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보통이 면세점에서 만났던 '공항 사제'인 스터디 목사는 생존해 있다면 지금은 80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보통이 전하는 그 목사님의 말을 다시 한번 곰곰이 곱씹어 본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지금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과거의 밑에 줄을 긋고 싶을 때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을 때, 어쩌면 공항이 그 답을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