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린 지에벨의 소설 『빅 마운틴 스캔들』
아파트 관리실에 들렀다가, 사무실 옆에 딸린 작은 도서실을 우연히 둘러보았다. 구비된 책이 많지 않은 빈약한 책장에서 남녀 한 쌍이 한 줄 밧줄에 의지한 채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겉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반가웠다.
프랑스 메르캉투르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한 범죄스릴러 소설 『빅 마운틴 스캔들』이었다. 프랑스 여류작가 카린 지에벨(Karine Giebel)의 소설로 원제는 『Jusqu'à ce que la mort nous unisse』, 영어로는 "Till Death Do Us Part(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로 번역된다.
소설의 배경인 메르캉투르 국립공원(Parc national du Mercantour)은 니스(Nice)에서 북쪽으로 약 50~70km 거리에 자리한 프랑스 남동부의 해발 3000m급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알프스 산악지대이다. 빙하가 깎은 계곡, 암벽, 깊은 숲과 호수 등 원시적 자연경관과 늑대, 아이벡스, 머플론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생태 보호구역이라고 한다.
주인공인 뱅상은 이 지역 최고 산악가이드로 5년 전 연인 로르가 갑작스레 종적을 감추자 깊은 상처를 안게 되어, 이후 여성을 불신하게 된다. 로르 역시 능숙한 등반가였으나 관광객의 유혹에 넘어가 어느 날 말도 없이 훌쩍 도시로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이유와 행방은 묘연하다. 뱅상이 협업하던 여행사의 신입 직원인 미리암은 뱅상과의 일회성 관계 후 비관하여 자살하고, 이에 뱅상은 비난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혼란으로 괴로워하는 여경 세르반이 콜마르 군인경찰대로 전입 오고, 그녀는 뱅상의 도움으로 메르캉투르 국립공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은 뱅상의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이자 국립공원 관리인이던 피에르의 원인 모를 추락사로부터 차츰 범죄 소설의 면모를 드러낸다. 사회적 편견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겪던 세르반은 뱅상의 도움으로 군인경찰대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면하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친밀감과 묘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뱅상은 친구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의심을 품고, 수사에 착수한 군인경찰대의 세르반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추적한다. 이들은 앙콜리 마을과 시장, 주민들을 만나며 국립공원 안에서 밀렵과 개발 특혜, 보조금 비리가 얽힌 복잡한 이권, 국립공원관리사무실 망소니 반장의 부인 기슬렌과 피에르의 불륜 등 새로운 진실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앙드레 시장과 그의 가족, 국립공원관리사무소, 군인경찰대 등 사건에 연루된 그 지역 권력층들의 협박과 위협도 점차 거세진다.
뱅상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던져주던 익명의 편지의 주인공인 조제프 신부는 뱅상이 찾아가자 사건 전말을 알려주려 하지 않고, 그다음 날 전화를 받은 뱅상이 성당으로 달려가지만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직후이다. 뱅상은 세르반과 함께 고산지대 샤스(Chasse)에 있는 조제프 신부의 별장에서 그의 비밀노트를 발견한다. 그 노트에는 "자신의 아들 세바스티엥과 조카 뤼도빅이 5년 전 사냥 중에 한 여인을 살해하였고, 남편인 앙베르와 그 동생 에르베의 도움으로 사체를 유기하고 모든 흔적을 지웠다"라는 앙드레 시장의 부인 쉬잔의 고해성사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와 더불어 살해된 여인이 그를 배신하고 떠났다고 알고 있던 그의 연인 로르였다는 내용과 함께.
뱅상과 세르반은 조제프 신부의 비밀 노트, 피에르가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던 앙베르와 망소니 반장의 검은 거래가 담긴 CD 등 사건 전모에 대한 증거를 군인경찰대의 베르톨리 하사관에게 인계한다. 관련자 검거 등 사건의 종말을 기다리던 두 사람은 앙드레 시장 등과 한패였던 베르톨리 하사의 유인으로 그 일당에게 붙잡혀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증거자료 복사본을 그 어디에 숨겨두었다"는 말로 일당을 현혹시킨 뱅상의 기지로 당장의 죽음을 면한 두 사람은 끌려간 산장의 창고에서 가까스로 탈출한다. 여름의 끝자락에 접어든 메르캉투르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넘어지고 굴러 떨어지고 총에 맞고 팔이 부러지는 등 아슬아슬한 도망과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오리 영감의 도움으로 총에 맞은 뱅상을 그의 집에 숨겨두고 도움을 청하러 가던 세르반은 결국 추격대에 가로막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된다. 그 순간, 로르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베르톨리 하사관의 아들 니콜라의 제보로 현장에 나타난 군인경찰대 르브룅 상사와 그 대원들이 앙드레 시장 일당을 제압한다.
이 소설은 불완전한 두 주인공 뱅상과 세르반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산악 풍광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상처, 욕망, 갈등 등 인간 내면의 심연을 비춘다.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에서 자극적인 음모와 반전이 뒤엉킨 범죄스릴러를 상상했지만, 인물들의 내면 감정과 심리에 더 집중하는 ‘심리스릴러’ 장르 소설에 가깝다. 소설의 결말에 주인공 뱅상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잘못된 오해의 해소, 편견과 트라우마의 탈피, 정체성의 회복 등 상처를 치유해 가는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메르캉투르 국립공원을 둘러싼 개발 압력과 밀렵 등 생태 환경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앙콜리(Ancoli), 콜마르(Colmar), 샤스, 알로스 호수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제 또는 가상의 지명들은 남부 알프스 고원지역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하는 요소로 재미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