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나선 멀고 긴 라이딩

@경기 광주시 경인천변의 아침

by 꿈꾸는 시시포스

새벽녘, 불현듯 눈을 떴다. 기척도 적막도 없는 정적 속에서 문득 ‘장거리 라이딩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솟구쳤다. 주저할 틈도 없이 가벼운 배낭을 챙겨 등에 메고, 자전거에 올라 이매역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전철역 플랫폼에 도착하니, 첫차 시각 05:34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경강선 전철은 부드럽게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주말이면 자전거 동반 탑승이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더들에겐 작은 축복이다. 한산한 객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의 여정을 그려본다. 경기광주역에서 출발해 경안천을 따라 번천, 산곡천, 한강, 탄천으로 이어지는 약 60~70킬로미터의 코스. 대여섯 시간쯤이면 될까. 마치 작은 여행길에 오르는 듯한 설렘이 묵직하게 배낭 속에 실려 있었다.

경기 광주 경안천의 이른 아침

한 정거장 앞인 삼동역에서 내린 젊은 라이더가 무언의 인사를 건넨 뒤 사라지고, 나는 그다음 역인 경기광주역에서 내렸다. 경안천 인도교를 건너 동편 자전거도로로 진입하자 목현천이 합류하는 하상이 녹음 짙은 풀숲으로 펼쳐진다. 광활한 들판 위로 아침 햇살이 천천히 기지개를 켠다. 이름처럼 ‘광주(廣州)’는 여백과 공간이 주는 감응이 크다. 여섯 시 무렵임에도 산책로에는 부지런한 이들이 오가며 가지런한 오선지처럼 정적인 천변 풍경에 리듬을 얹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곤지암천 합수부를 지나고, 다시 풀밭을 지나 허난설헌 묘가 있는 국수봉 들머리에서 또 한 번 경안천을 건넌다. 저 멀리 백로 한 쌍이 수면 위를 휘돌며 춤을 추듯 날고 있었다. 좌우로는 국수봉과 칠사산이 천변길을 끼고 수묵화처럼 이어지고, 그 풍경이 그대로 수면 위에 스민다. 이곳이 선경(仙境)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가 선경일까.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는 교각 사이로는 햇빛을 등진 무갑산이 위용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가파른 칠사산 사면을 끼고 이어지던 산책로가 다할 즈음 손바닥만 한 부용꽃 한 무리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도달한 서하리.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자리한 마을이다. 안개가 산 능선을 감싸며 햇살과 씨름하듯 퍼지고 있었다. 경안천을 감아도는 서하리의 비닐하우스 지대는 예상보다 더 넓고, 더 조용했다.

칠사산을 끼고 흐르는 경안천
서하리의 비닐하우스 농장

곧 번천으로 진입했다. 자전거길이 끊긴 상류에서는 해공로를 따라 달렸다. 휴일 아침이라 차량이 드물어 오히려 쾌적하다. 내곡천이 합류하면서 경사가 슬며시 심해진다. 허벅지가 묵직하게 반응하며 이 여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경안 톨게이트 근방에서 회안대로로 진입하니, 태허정로와 해공로가 교차하는 삼거리에서 ‘번내정’ 정자가 보인다. 탁월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무심하게 내달리는 차량들 소음이 그 고즈넉함을 앗아간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남한산성길 입구를 지나치며 회안대로는 은고개로 향한다.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내달리는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예상보다 수월하게 고갯마루에 도달했다. 어느덧 하남시로 진입했고, 지장사가 고개 너머에서 조용히 맞이해 준다.

하남대로는 산곡천과 함께 6킬로미터가 넘는 긴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좌우로는 청량산과 용마산에서 뻗은 긴 능선이 몰아치듯 내달리다, 다시 봉긋이 솟으며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새능교 위에서는 산곡천 상류를 따라 용마산이 눈앞에 그림처럼 다가왔다. 산곡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 한적한 체육공원 한편에 ‘하남 시민을 위한 무료 생수’ 냉장고가 놓여 있다. 빼곡한 작은 생수병 중 하나를 꺼내 목을 축인다.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배려가 이 무더운 여정에 깊이 스며든다.

광주시와 하남시의 경계 은고개(중)/ 지장사(우)
산곡천 하구에 자리한 쉼터(우)

한강 자전거길은 마치 속도를 향한 경연장 같다. 사이클 경기 선수 옷차림의 라이더들이 쌍쌍이 또는 줄지어 느린 라이더를 추월하며 바람을 가르고 질주하는 모습은 경기장을 옮겨놓은 듯 보인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다소 비껴 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속도도 거리도 아닌, '느린 라이딩'이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에 눈을 멈추고, 강물 위에 떨어진 햇살 한 조각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라이딩의 본질이 질주라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순간의 풍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가깝다. 느린 라이딩의 여백진 시간과 공간을 충만한 감성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지척에 있는 팔당대교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하류 방향으로 페달을 돌린다. 덕풍천을 지나 다시 한강변으로 진입했다. 거대한 녹지를 끼고 미사대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길은 밋밋하고 지루하지만, 강변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40km를 달려왔을 즈음 고덕동과 토평동을 잇는 고덕토평대교에 도착했다. 하프처럼 펼쳐진 케이블의 곡선이 눈을 사로잡는다. 세계 최장 교각 간격을 자랑한다는 이 사장교를 벤치에 앉아 한동안 바라보았다.

팔당대교 아래에서
고덕태평대교/구리암사대교
국내 최초로 하수처리시설, 폐기물처리시설, 소각시설 등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공원과 전망대를 조성한 하남 유니온파크
한강변 물놀이장

다리를 쉬어보려 앉았지만 어깻죽지와 엉덩이도 각기 피로를 호소하며 항의해 온다. 구리암사대교를 지나 천호대교 아래 그늘에서 다시 안장에서 내렸다. 고개를 드니 청담대교, 그리고 남산 N 타워가 아스라하게 시야로 밀려든다. 곧 탄천이다. 탄천고가 아래 벤치에서 다섯 시간을 채운 라이딩을 잠시 돌아본다. 가끔씩 오가던 서울공항을 따라 곧게 뻗은 자전거길이 유난히 끝이 없을 듯 아스라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고, 물은 바닥이 났고, 무릎은 단 한 번도 더 페달을 밟을 수 없을 듯 아우성이다. 독정천과 탄천이 만나는 지점의 체육공원 벤치로 찾아들며, 부근 편의점에서 식혜와 생막걸리 한 병씩을 샀다. 첨밀밀(甛密密) 노랫가락처럼 다디단 식혜가 타는 목과 지친 무릎, 짓눌린 엉덩이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탄천교 아래 벤치에서 다시 짧은 숨을 고른 후, 마침내 지척으로 다가온 집으로 페달을 밀었다. 생애 가장 멀고 긴 라이딩을 끝내는 순간이다. 땀과 고통,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충일감이 밀려드는 하루였다. 막걸리 한 잔으로 마무리하기에 걸맞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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