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는 때 이른 무더위가 이어진다. 날씨 알림이는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릴 것이라 예고했지만, 날씨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몸이 자꾸 피동적이 된다. 그래서 오늘은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고불산 동편 자락의 임도를 따라 한 바퀴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광주시 직동마을회관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걷기를 시작했다. 기온은 30도를 웃돌았고, 날은 흐렸지만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막기 위해 선크림을 바르고 토시, 긴바지로 철저히 무장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머리 위로 차량이 씽씽 달리는 광주-원주고속도로의 중원터널과 직동터널 사이 도로 아래 토끼굴을 지나자, 곧 고불산 임도 초입으로 들어섰다. 직리천 최상류 발원지는 마른 바닥을 드러낸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고, 직리천이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임도변 풀숲에서는 팔공여치들이 짝짓기에 분주하고, 한여름 땀냄새에 이끌린 날벌레들이 얼굴로 달려든다. 해충 퇴치제를 챙기지 않은 내 탓이지, 본능에 충실한 저 작은 생명들을 탓할 순 없다. 고도를 차츰 높여 능선 아래 평탄한 길로 들어서자, 귀를 때리던 차량 소음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출발 지점에서 1.6km쯤 지났을 때, 고불산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길은 생각보다 넓고 반듯해서 그 가장자리에 승용차가 두어 대 주차돼 있었다. 좌측 아래로는 축구장만 한 평평한 공터가 텃밭으로 쓰이고 있었고, 비닐 천막 아래에는 사람 모습도 보였다. 풀숲을 염려해 긴바지를 입은 건 기우였고, MTB 라이딩 코스로도 제격일 듯싶다.
두어 번 더 갈림길 이정표가 고불산 정상으로 오르라고 손짓했지만, 오늘의 콘셉트는 어디까지나 임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이라 애써 외면했다. 모자를 벗어 얼굴 앞을 맴도는 날벌레를 쫓다 보니 어느새 임도는 출발점에서 1/4쯤 되는 지점에서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맞은편에서 픽업트럭 한 대가 서서히 다가오더니, 산불감시요원으로 보이는 근무복 차림의 장년이 창문을 내리고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도 앱을 보니 이곳이 중원터널 위쯤이다. 난개발로 소문난 광주에 이런 호젓하게 잘 보존된 하이킹 코스가 숨어 있을 줄이야. 좌측으로 튀어나온 가파른 사면 위 벤치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 온 수박을 넣은 냉수로 목을 축였다. 걷는 이 하나 보이지 않는 이 고요가 오히려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임도는 깊은 골짜기를 따라 휘돌며 저 멀리 광주 시가지를 살짝 드러내 보여 주었다. 칡넝쿨이 나뭇가지를 타고 임도 위를 터널처럼 덮었다. 2.17km 지점에 도착하자 이정표가 고불산 임도가 여기서 끝나며, 이제부터는 1.29km 길이의 영장산 임도가 이어진다고 알린다.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모퉁이를 돌자 영장산 임도로 접어들었다. 숲은 더욱 빽빽해졌고, 임도는 자동차 바퀴 자국만 흙이 드러난 채 잡초로 덮였다. 영장산 정상 턱밑으로 깊게 파고드는 임도는 완연한 산중 같아, 인공의 소리가 사라지고 숲만의 숨결이 느껴졌다. 오른편으로는 영장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나비 한 마리가 얼굴 앞을 스치고 지나갔고, 우측 칡넝쿨 속에서는 사슴인지 고라니인지 모를 짐승이 부시럭이며 자취를 감췄다. 영장산 정상 아래 임도는 가파른 사면에 밀림처럼 무성한 숲과 넝쿨을 품고 있었다.
이윽고 내리막을 따라 고도를 낮춘 임도는 유턴하듯 방향을 홱 틀어 원점으로 향한다. 각양각색 나비들이 꽃에 앉아 꿀을 빠는 모습이 평화롭다. 왼편 머리 위로는 영장산 봉우리가 숲 사이로 봉긋이 모습을 드러냈고, 우측 깊은 골짜기는 칡넝쿨 잎사귀가 심해처럼 일렁였다.
쉴만한 벤치 하나가 그리워질 즈음, 계곡 위 작은 다리 건너편에 탁자와 벤치가 놓인 정자가 나타났다. 배낭에서 참외를 꺼내 허기를 달래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른편 가파른 사면을 낀 정자 부근 임도는 황톳빛으로 새로 정비돼 바퀴자국이 빼곡했다.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숲 속에서 산비둘기가 꾹 꾹 울었다.
탁 트인 전망을 주진 않지만, 숲 속에서 명상하듯 걷기에 이만한 길도 없겠다 싶다. 직리천의 곁가지 하나가 시작되는 곳 부근에서 임도 아래로 홀연히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칡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텃밭에는 열매에 봉지를 씌운 배나무, 꼬맹이 주먹만큼 여문 사과나무, 금강초롱을 닮은 꽃을 주렁주렁 매단 참깨가 농가와 어우러져 풍성한 가을을 꿈꾸고 있다.
마을회관 옆 슈퍼 그늘막 벤치에는 동네 어르신 서넛이 소주와 안줏거리를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정겨운 시골마을 풍경이다. 10km 남짓 되는 호젓한 하이킹을 마치니, 더위를 식혀 주려는 듯 마침 빗줄기가 굵어지며 흩뿌리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