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대표 언론사 둘이 사이좋게 봄과 가을 각각 하나씩 국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다. 오늘은 그중 l 일보 주관 국제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문학경기장으로 차를 몰았다. 3월 말 이른 봄날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고 공기는 제법 차다. 비를 뿌리고 바람을 몰아치던 어제 날씨가 아직 변덕을 내려놓기 싫은가 보다.
마라톤 출발시간보다 한 시간여 일찍 도착해서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삼삼오오 무리 진 사람들 틈에 끼어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경기장 바깥 주변 공터에 어깨를 맞대고 빽빽이 들어선 회사 단체 고교 대학 관공서 등의 마라톤 동호회 부스들은 사람들로 빼곡하다.
일찍이 주몽의 아들 비류가 남하해서 나라를 세운 이곳은 조선 시대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던 지역 중심지였으나 개항 후 제물포에 그 역할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2002 월드컵 경기가 열린 주경기장을 비롯해서 보조경기장, 수영장, 야구장 등이 들어서면서 인천지역 스포츠 메카가 되었다.
직장 마라톤 동호회 부스에서 낯익은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 대회는 우리 동호회원에서 예년에 비해 제법 많은 40여 명 참가했다. 부스에 플래카드를 달고 바닥에 매트를 깔고 간식을 준비하고 짐을 간수하는 등 서포터 역을 맡은 직원들의 노고가 크다. 정작 자신들은 달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 동료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국제하프마라톤 출발 모습(사진: 천지일보)
출발 시간을 멀찍이 앞두고 팬츠와 배번을 붙인 셔츠를 갖춰 입고 기록계 띠지를 신발 끈에 고정했다. 출발 직전엔 함께 모여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출발 준비를 했다. 9시경, 엘리트 러너들에 이어 하프, 10km, 5km 코스 마스터스들도 밀물처럼 힘차게 스타트라인을 출발했다.
우승 준우승 3등 상금 각각 7,5,3천 불이 걸린 엘리트 부문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대만 케냐 홍콩 중국 일본 등 국내외 선수 90여 명, 10킬로미터 코스에는 2천8백여 명 등 총 1222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고 한다. 마라톤 저변이 확산되고 대회도 많이 개최되면서 소위 '상금 사냥꾼'도 생겨났다고 한다.
편도 코스 대신에 주로 왕복이나 순환 코스로 진행되는 현대 마라톤의 형식대로 이번 대회는 왕복 코스다. 10km 코스는 연수구청 부근에 반환점이 있다. 2018년 7월에 '남구'에서 '미추홀 구'로 옛 이름을 되찾은 이곳도 사월을 하루 앞두고 있지만 꽃샘바람이 제법 매섭다. 그래서인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던 벚꽃나무 등 가로수들이 다시 옷을 여미고 잔뜩 움츠리고 있다.
반바지, 긴 바지, 반팔이나 긴팔 셔츠, 모자 쓴 사람, 팔에 부착한 스마트 폰에서 이어폰을 연결해서 귀에 꼽은 사람, 셀카봉을 든 사람, 일찌감치 걷는 사람,... 옷차림만큼이나 뛰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운동장 트랙을 나서서 매소홀로를 거쳐 넓은 경원대로로 접어들었다. 도로변 주유소, 지하차도, 선학역 등 낯익은 모습에서 두 해 전 참가했던 대회가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옆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던 동료 C가 앞으로 멀찍이 달려 나간다. 마라톤 풀코스는 물론이고 울트라 마라톤에도 여러 번 참가한 베테랑인 그를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 꼴이 되긴 싫기에 내 호흡과 보폭을 지키며 페이스 유지에 유념할 뿐이다.경험이 적은 나로서는 3킬로미터 부근은 서서히 고통이 밀려오며 마음에 이는 갈등과 버거운 씨름이 시작되는 가장 힘든 구간 중 하나다.
대개 마라톤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서 달려줄 수는 없다. 상대방이 있는 다른 경기와는 달리 싸워 이겨야 할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때까지 모든 고통을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고독한 러너'라는 노래도 있듯이 러너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10킬로미터 반환점을 멀리 앞둔 지점에서 종아리가 저려오고 숨은 점점 가빠지는데, 선두 그룹은 벌써 반환점을 돌아 출발점이자 골인지점을 향해서 지친 기색 없이 힘차게 다리를 내뻗는다. 출발 30여 분쯤에 반환점 부근에 마련된 음수대에서 생수 한 컵을 집어 들어 목을 축이고 반환점을 돌았다.
하프 마라톤 코스를 힘겹게 달리는 참가자들
반환점에서의 물 한 컵과 스포츠 음료 한 모금은 지친 러너에게 커다란 위안이다. 주야로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고 만난 오아시스에서 갈증으로 타는 목을 축이는 낙타와 대상이 느끼는 기분도 이럴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하프 코스에 참가한 검은 피부의 건각들이 마스터즈 옆을 쏜살같이 스쳐 지난다. 초청 선수 등 네 명의 케냐 선수들 중 두세 명이 선두를 달리고, 그 뒤를 멀찍이 간격을 두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하나 둘 뒤따른다.
출발점과 골인 지점 간 42.195km를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달리는 극한 경기, 그래서일까? 마라톤은 올림픽 마지막 경기이자 메달도 폐회식에서 시상하는 등 우승자에게 영광과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올림픽의 꽃'이라고들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말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금언이다. 기록과 우승에 목말라할 마라톤 선수나 감독은 '마라톤은 인생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은 굽이굽이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인생처럼 마라톤도 시시각각 온몸으로 밀려오는 고통에 직면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청춘의 로맨스, 결혼, 첫 아이 탄생, 내 집 마련 등 인생에서 한때의 기쁨처럼 마라톤에서 가끔 찾아온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순간은 짧기만 하단다.
한편, 마라톤은 다른 종목에 비해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도 많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 대회에고 참석한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이자 한국 최고 기록 보유자인 늦깎이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가 그 좋은 예다. 그래서 마라톤에 비유되는 인생에서도 늦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고, 누구나 대기만성을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1km 구간은 매 순간순간 당장 뜀박질을 멈추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극에 달한다. 피니시 라인이 있는 트랙으로 들어서기 전 경기장으로 진입하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짧지만 가장 힘든 고비로 고통과 골인의 열망이 서로 크로스 하는 클라이맥스다.
말이 마라톤이지 겨우 10km 코스의 뜀박질이지만 여하튼 코스 막바지는 버겁고, 더군다나 경사라고 하기조차 어색하나마 비스듬한 오르막은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완주의 기쁨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왔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황영조 선수가 선두 주자를 제치고 거침없는 기관차처럼 몽주익 언덕을 뛰어오르던 감동적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날 경기는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악의 무더위와 최악의 난코스의 조합이었다고 한다. '몬주익의 영웅'이란 칭송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마라톤 마니아인 소설가 하루끼는 마라톤 풀코스에 끌리는 이유를 "이따금 자신을 알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보려는 내재된 욕망"으로 유추하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색도 할 수 있는 산행이나 걷기에 더 빠져있고, 풀코스 반의 반 거리도 힘겨워하는 나로서는 '러너스 하이'를 기대하거나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마라톤에 대한 선문답 같은 형이상학적 철학도 없다. 다만, 하루끼가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며 느꼈다는 '고통도 생각도 머릿속에서 다 사라지는' 경험을 한 번쯤은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58분 11초"
잠시 후 메시지에 링크된 사이트로 기록이 날아들었다. 변변찮은 기록이다. 그렇지만 어디 몬주익 언덕의 황영조만 영웅일까? 그 뒤를 따라 골인한 2위, 3위,... 그리고 오늘 대회에 참가해서 완주한 우리들 또한 작은 영웅들이라고 스스로 추켜주고 싶다. 각자 자기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완주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