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한 주가 지나고 주말이다. 오랜만에 구두를 닦으려고 아파트 현관 신발장을 열었다. 자주 신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구두 두 켤레, 개켜 구겨진 운동화, 등산화 등 내 신발을 비롯해서 아내와 아이들 신발까지 신발장 맨 위칸에서 맨 아래칸까지 여러 종류의 신발들이 빈자리 없이 차지하고 있다.
검은색 구두 한 켤레는 발등 주름진 부분이 갈라지고 뒤 굽은 닳아 낮아졌다. 한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소낙비 지나간 보도블록, 한겨울 얼어붙은 길바닥, 두어 해 동안 그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S시와 부산을 오가는 주말부부 생활도 이제 익숙해 갈 무렵 그 구두가 탈이 나고 말았다. 오른쪽 엄지발가락 부분 바닥과 갑피의 박음질 부분이 찢어진 것이다. 서둘러 새 구두를 한 켤레 샀지만 그동안 편하고 익숙했던 기억 때문에 낡은 구두를 버리지 못하고 수선을 해서 신발장에 넣어 두었었다.
그중에 오래된 친구 같은 등산화 한 켤레도 눈에 띈다. 팔 년 넘게 멀고 가까운 산행을 함께 했으니 등산화는 내 발을 어색함 없이 받아들이고 내 발도 등산화가 제 집처럼 편해서 정이 깊어졌다. 그래서인지 새로 산 등산화보다 더 애착이 간다. 이 친구도 밑창이 떨어져 너덜거리고 뒤꿈치 부분이 헤졌는데, 며칠 전 동네 수선 가게에 맡겼더니 산행을 몇 번 더 할 수 있을 만큼 멀쩡해졌다.
작년 40년 만에 얼굴을 보는 고향 친구가 어제 본 것처럼 스스럼없었듯 물건도 마찬가지다. 이십여 년 전에 산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맥가이버 칼, 북경에서 둘째가 태어난 날 구입한 특별할 것 없는 손목시계, 십 년이 넘은 옛 스타일의 겨울 코트, 해외 출장 때 하나 둘 모은 기념품 마그네트들... 오래된 친구가 익숙하고 편한 것처럼 이런 오래되고 추억이 깃든 물건에게는 특별히 정이 간다.
새로 산 양복도 제 딴에 케미가 맞지 않으면 옷장 속에 잠재우다 바자회에 내놓기도 했지만, 십 년 넘게 입어 소매와 안감이 해진 옷도 만만찮은 수선비를 들이고서도 굳이 고쳐서 입는 경우도 있다. "버리고 새 것 한 벌 사요"라는 귀에 익은 아내의 권유도 마다하고서... 타고난 천성이요 고상한 취향이라고 자위하지만, 스스로 곰곰 생각해 보면 아내 말을 빌리지 않아도 성격이 까다롭고 취향도 유별난 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 싶다.
까만 고무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발에 관한 첫 기억, 초등학교 때 버드나무가 늘어선 동네 개천에서 멱을 감으며 까만 고무신을 조각배처럼 물에 띄워 보내며 쫓아가던 추억이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신발에 관한 기억들은 대체로 아리고 쓰리다. 학교 복도 신발장에 벗어놓은 새 운동화가 없어지거나 문상 집에서 새로 산 구두를 누군가가 자신의 헌 신발과 바꿔 신고 가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중에서 군 훈련소에서 겨우 일주일 먼저 입교한 선임 훈련병들에게 새 군화를 강탈당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군화뿐 아니라 전투복 심지어는 빨랫줄에 걸어 둔 양말이나 팬티까지 없어지던 일이 지금은 없어졌을까?
우리 세대는 신발뿐 아니라 호롱불 곤로 수동 전화기 흑백 TV 등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물건들에 얽힌 추억들이 유년의 기억창고를 그득 채우고 있다. 그 기억들은 우리 세대만이 간직할 수 있는 쓰리지만 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들이다.
닦은 구두를 신발장에 넣고 등산화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장식장 안에 놓인 엄지 마디만 한 앙증맞은 델프트 나막신 한 켤레가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이제 저하고 달콤했던 유럽여행의 추억을 떠올려 봐요"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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