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부터 시작된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날이다. 출근길 바지가 흠뻑 젖을 만큼 내리던 굵은 비는 그치고 실비가 흩날린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다. 수미르 공원 맞은편 정거장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영도로 향했다.
영선로터리에서 내려 봉래산 남서쪽 자락 바다에 접한 흰여울문화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봉래산은 온전히 안개에 덮였고 비탈을 따라 들어선 마을들도 두꺼운 안개 이불을 덮어쓰고 있다.
봉래산 남쪽 해안을 따라 대교동에서 중리바닷가를 지나 동삼동까지 이어지는 5.6km여 절영로, 흰여울마을은 절영로 아래 1km여 해안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 너머 송도를 마주보는 흰여울마을, 봉래산 기슭에 여러 갈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흐르던 모습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절영로에서 맏머리 꼬막집 무지개 피아노 도돌이 등 5개 계단길이 사다리 마냥 흰여울마을을 지나 해안산책로로 나 있다. 마을 초입 맏머리계단 옆 비탈을 따라 바다로 난 개천이 마침 내린 비로 하얀 물줄기를 폭포처럼 내리치고 있다.
계단 아래 바다에 접한 산책로는 걷거나 라이딩하는 사람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파도는 연신 해변으로 밀려와서 바위와 암반에 부딪쳐 하얀 물거품으로 부서진다. 남항대교가 안개 속에 겨우 모습을 보이고 송도 바다 뒤 낮은 장군산 진정산은 무거운 안개를 잔뜩 머리에 이고 있다.
절영로 앞바다, 남항 외항에 닻을 내린 크고 작은 선박 여러 척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 7~80척 중대형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고단한 항해의 여독을 풀고 또 다른 항해를 준비하는 묘박지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피아노계단으로 올라가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꼬막을 닮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쪽 팔만 벌려도 벽에 닿을 좁은 골목, 화분을 텃밭 삼아 고추를 심고 창가에 앙증스런 화분을 놓은 집들, 제비 둥지같은 비탈길 옆 공중화장실...
마을 초입 이송도삼거리에서 경찰이 차량 진입을 통제했었는데, 마을 중간 쯤 절영로 아래 유실된 비탈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절영로가 금방이라도 마을로 내려앉을 듯 위태하다.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낭만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이름과 달리 이곳 주민들이 부닥치는 녹록치 않은 일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영도 출신으로 작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김영애, 마을 벽면 한 곳에 영화 '변호인' 속 배우들과 함께 그녀가 활짝 웃고 있다. 투병 중에도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에 임하는 투혼을 보여준 그녀에게 월계관을 씌워드리고 싶다.
폐가와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2011.12월 지역 예술인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등 영화도 촬영되는 등 명실상부하게 '문화'마을로 변모하려는 흰여울마을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흰여울'문화'마을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처럼 문화가 깃들어 자리 잡고 꽃 피우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소망과 믿음이 배어있는 이름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냥 '흰여울마을'이 더 순수하고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발길을 돌려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뒤돌아보니 절영로 아래 바다는 아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듯 하얀 파도를 부수고 있다. 봉래산은 여전히 안개에 묻혀 있다. 정거장으로 향했다. 맑게 개인 날 다시 한 번 더 영도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