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 따라 라이딩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선선한 것이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그 기운에 이끌려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섰다. 탄천을 따라 달려 운중천으로 들어서고, 청계고개를 넘어 학의천을 거쳐 과천을 지나 양재천을 따라 다시 탄천으로 돌아오는 약 50km의 여정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운중천 천변로의 아침은 활기가 가득하다. 일렬로 늘어서 질주하는 라이더들, 아이와 함께 나란히 페달을 밟는 가족, 천천히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흐르는 물소리와 어우러져 생동감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판교를 가로지르고, 화랑공원을 지나 운중천 상류로 접어드니, 빌딩숲 대신 청계산과 우담산 자락의 녹음에 안긴 마을이 다가온다.
20여 년 전, 분당으로 이사 오던 무렵만 해도 이 일대는 논과 밭이 펼쳐진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이 빽빽이 들어서서 말 그대로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판교원교 다리 아래, 빠른 물살 위에서 순백의 깃털을 고르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페킨 덕 한 쌍이 한참 동안 발을 붙잡는다. 저 멀리 넘어가야 할 고개, 청계산과 우담산의 능선이 내려앉으며 만나는 하오재는 멀리서도 높아만 보인다.
운중천 발원지 아래 자리한 산운마을에 들어서니, 청계산 줄기 아래 아늑히 자리한 계획 주택단지가 눈길을 끈다. 핀란드 건축가 페카 헬린이 설계한 1단지 타운하우스, 프리츠커상 수상자 일본인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2단지 주택, 그리고 국내 건축사가 디자인한 7단지 테라스하우스 단지까지,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며 자연과에 어우진 단지들을 한 바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운중저수지를 지나 하오재 고갯길로 오르는 비탈길이 숨을 차오르게 하고 결국엔 나를 안장에서 끌어내렸다. 고개 위쪽에서 라이더들이 고개 아래로 연신 씽씽 스쳐 지나고, 건장한 라이더 한 무리가 고개 위로 페달을 지쳐 오른다. 땀이 헬멧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지만, 뒤이어 올라오는 라이더 뒤에 따라붙으려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드디어 청계산과 우담산을 잇는 구름다리 아래 하오재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내리막으로 접어드니 오를 때의 고생이 무색하다는 듯,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쾌감이 남다르다. 영광은 한순간의 희열이듯 내리막을 질주하는 쾌감도 빠른 속도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오재 고개 내리막길이 다하고 학현로입구사거리 건널목을 지나 학익천 천변도로로 들어섰다. 학익천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화사하게 피어 있는 무궁화 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포일동 꽃집 앞에 줄지어 놓인 화분의 국화는 아직 봉오리를 꼭 다물고 있었지만, 곧 가을의 향기를 풍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구치소 삼거리의 380년 된 느티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느티나무 맞은편 공사장 가림막에 걸린, 웃픈 계엄을 연출했던 장본인을 석방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쓴웃음을 머금게 한다.
과천대로를 따라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포근히 안겨 있는 과천 시내로 들어섰다. 어느덧 여정의 중간 지점쯤이다. 과천중앙공원을 지나 양재천 자전거도로로 내려서서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다시 페달을 밟았다. 양재천 위에 놓인 여러 다리들을 이리저리 건너며 하류 쪽으로 달린다. 제방의 무성한 풀숲 사이에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영동 2교 부근 쉼터에서는 버스킹 음악과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채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영동 6교 아래 쉼터에서 자전거에서 내려 몸을 풀고 계단에 앉았다. 까치 한 마리가 살며시 곁에 내려앉았다가 멀어져 갔고, 비둘기 한 마리가 곁으로 다가와서 잠시 함께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물속처럼 천변은 소란스러운 도시과는 달리 고요히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온몸이 뻐근해질 즈음, 양재천이 탄천과 만나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 부근 파크골프장에서 경기를 즐기는 노인들의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마지막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 페달을 밟아, 마침내 원점인 탄천운동장 부근에 도착했다.
동방삭 보도교 건너편 공원에서는 성남백중놀이한마당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고운 한복 차림에 장구를 맨 노 무용수 두 분이 태평소 등 음악에 맞춰 진도굿춤을 신명 나게 펼치며 개막을 알리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한 공연은 힘겨웠던 완주를 축하해 주는 선물 같았다. 제방 객석에 앉아 끝까지 공연을 지켜보고,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보탰다.
예부터 일꾼들과 농민들이 분주하던 일손을 잠시 내려놓고 먹고 마시고 놀면서 보낸다는 백중(百中) 날도 일주일 전에 지났다. 시나브로 계절은 가을걷이 채비로 마음이 분주한 때로 접어들 것이다. 집 앞 슈퍼에서 사 온 막걸리 한 병을 반주 삼아, 가을빛과 땀으로 얼룩진 오늘의 천변 라이딩을 갈무리해 본다. 내 텅 빈 마음의 곳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그림을 그려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