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우중산행

계절을 재촉하는 비

by 꿈꾸는 시시포스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이자 단기 4358년 개천절 날이다. 하늘이 처음 열렸다는 기념일이건만, 집을 나서자 무채색 하늘이 비를 뿌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서 차를 몰아 과천으로 이동한 후에 전철을 타고 사당으로 향했다. 일기예보를 살펴보지도 않고 친구 M과 함께 관악산 산행을 하기로 했던 터였다.

사당 전철역 지하도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와 M을 만났다. 마침 하늘은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한적했던 전철 객실처럼 사당역 부근 차도와 인도에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적이던 일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빗줄기를 피해 버스정류장과 편의점 처마 아래서 배낭을 내리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산객들 모습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M과 나는 정오쯤에 비가 개일 것이라는 예보를 믿고 산행을 결행하기로 했다. 우산을 나란히 펼쳐 들고 관음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음사에서 관악능선을 따라 제1국기봉을 거쳐 연주봉에 오른 뒤 자하능선을 타고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서는 산행 코스를 마음속으로 그렸다. 비 때문에 당초 계획했던 파이프 능선을 경유하는 코스를 바꾼 것이다. 잦아들 줄 모르고 흩날리듯 뿌리는 빗줄기 사이로 살랑대며 부는 바람은 서늘했지만 어느새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본격적인 암벽 구간을 앞두고 반팔로 갈아입고, 배낭 속 모자를 꺼내 눌러썼다.

국기봉으로 오르는 등로에 들어서자 언제 쫓아왔는지 뒤에서 산객들이 줄지어 따라 오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느린 산행' 콘셉트로 느긋하게 마음을 잡았다. 서두르지 않고, 빗방울이 그려내는 가을 산의 풍경을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국기봉으로 이어지는 암벽이 우뚝 우리 앞을 막아선다. 한여름 내내 강렬한 태양에 뜨겁게 달구어졌을 바위는 빗물에 젖어 차갑게 식어, 손바닥이 닿자 시원스러운 감촉이 전해왔다.

우산을 접고 가는 빗줄기 속에 중간중간 숨을 고를만한 공간을 내어준 수십 미터 바위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절벽을 등지고 뒤돌아서자 운무와 어우러진 서울 시가지가 한 폭 수묵화처럼 장관을 펼치고 있다. 그 희미한 풍경이 가을 빗속의 정취를 더했다. 날렵한 몸매의 한 중년 여성이 날렵하게 우리를 앞질러 암벽 위로 사라졌다.

제1국기봉으로 올라서자 해지고 낡은 흔적이 역력한 태극기가 비에 젖어 풀이 죽은 듯 깃대에 몸을 늘어뜨린 채 우리를 맞이한다. 빗줄기는 잦아들지 않고 굵어졌고 우리는 우산을 다시 펼쳐 들었다. 국기봉을 지난 후부터는 예전에 보이지 않던 철계단이 비에 젖은 암벽에 기대어 주 능선을 따라 놓여 있어 한결 수고로움을 들어준다.

관악문을 지나자 비 내리는 바위 능선은 마당바위를 지나니 좌측으로 파이프 능선이 멀리 보였다. 경기오악(京畿五岳) 중 하나답게 암벽과 암릉 투성이의 거친 산세의 관악산이 잠시 마사토로 덮인 흙길과 호젓한 솔숲길을 내놓았다. 문득 입가에서 옛 시 한 수가 저절로 번져 나왔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山田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었으니

목동이 牛洋을 몰아 잠든 나를 깨우도다

_김굉필(金宏弼, 1454-1504)


기껏 옛 시구 속 전원에서 한가로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처사의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 산중 빗속을 더듬는 것도 운치가 그만이다.

연주봉이 눈앞으로 다가올 즈음, 빗줄기는 잦아들고 바람은 더욱 서늘해졌다. 정상 표지석 앞에는 인증 사진을 남길 차례를 기다리는 산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대부분은 20~30대 젊은이들이다. 땀과 비에 젖은 싱그러운 웃음과 활기찬 표정은 오늘 산행이 그들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표지석 뒤로 바위병풍처럼 둘러선 연주봉 위에서 비에 젖어 독특한 매력을 발하고 있는 관악의 장쾌한 풍치를 한동안 감미했다. 연주봉 우측 가장자리의 좁은 통로로 휘돌아 천애절벽 위에 자리한 연주대(戀主臺)에 들렀다. 숭유배불의 통치이념 아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무학대사의 권유로 연주대에 올라 국운장구를 빌고 서울을 비치는 화산(火山)의 불길을 진정시키고자 연주암 등 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주홍빛 수많은 연등이 수놓은 응진전 안팎에는 불자들 네댓 분이 좁은 공간 안팎에서 연신 절을 올리고 있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백척간두 아찔한 곳까지 올라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을 낮추는 저들의 기원이 꼭 응답을 받으면 좋겠다.

눈 아래 들어오는 연주암을 뒤로하고 송신탑 봉우리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말바위 암봉을 힘겹게 넘어서는데, 바위틈에서 작은 야생화 몇 송이가 눈에 띄었다. 빗속에서 소담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그 모습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삶을 일궈낸 그 작은 생명의 꺾이지 않는 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송신탑 봉우리를 우측으로 휘돌아 자하능선으로 하산 코스를 잡았다. 두꺼비 바위, 새 바위, 투구 바위를 비롯해서 수많은 이름 없는 바위와 암벽이 길게 이어진 이 능선은 '케이블카 능선'으로도 불린다. 이 능선을 따라 산 아래서 송신탑까지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선로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하능선에 들어서자 과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위무덤 위에 걸터앉아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을 끌러 허기진 배를 달랬다. 비에 젖은 도시와 산이 빚어내는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다가왔다.

정오가 지난 시각이지만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산객들이 적지 않다. 두꺼비바위 앞에서는 산객 둘이 '인생 샷'이라도 남기려는 것인지 독특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고 부산을 떨고 있다. 새바위로 이어지는 암벽에서는 올라오는 산객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한동안을 기다려야 했다. 조급해할 이유 없는 느린 걸음 느긋함 속에 산행의 참맛이 느껴졌다.

과천 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 '해누리 전망대' 공사 현장의 철골 구조물 설치작업이 한창이다. 과천구세군교회 뒤편으로 내려서며 다섯 시간 반에 걸친 약 9km의 산행을 끝마쳤다.

멈췄다가 날머리 부근에서 간간이 흩뿌리던 비는 완전히 멈추었다. 시성(詩聖) 두보가 "좋은 비가 시절을 알고 내린다(好雨知時節)"고 노래했던 그 구절이, 오늘 산행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느낌이다. 계절을 재촉하는 이 비에 이어, 며칠 뒤면 한껏 둥글게 부풀어 오른 달이 우리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좋은 계절 가을의 한가운데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