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수락 연계산행
제579돌 한글날 아침이다. 잠을 깨우는 아내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알람이 울릴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허둥지둥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배낭에 물통과 간식 등을 서둘러 쑤셔 넣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친구들과의 산행 약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척에 있는 전철역까지 차로 태워다 주며 "즐거운 산행되세요"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하고 재빨리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화랑대역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각에 간신히 맞춰 있었다.
화랑대철도공원, 옛 경춘선 철길을 따라 산행의 들머리 방향인 공릉산 백세문 쪽으로 향했다. 예전 M과 서울둘레길 탐방 때 지나간 적이 있는 백세문을 통과해서 불암산 자락을 휘도는 서울둘레길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갈림길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멀리 짙푸른 솔숲을 이룬 불암산 정상의 암봉이 단단한 근육처럼 솟아 있다. 평탄한 솔숲길을 따라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정상까지 2.3km를 남기고 경사진 계단길이 나타났다. 숨이 가빠오지만 능선마루로 올라서니 정자 하나가 반긴다. 북한산 삼각봉 등 서울의 북쪽 능선들이 손에 잡힐 듯 눈앞 가까이 다가오고 남쪽으로는 남산을 비롯해서 관악산 등이 조망되는 등 전망이 막힘이 없다.
노송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한참을 오르니 바윗돌 위에 전망대가 나타나고, 남양주 방면으로 양평까지 뻗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엔진처럼 멈추지 않는 M은 저 앞에서 속도를 높였고, 나는 B의 “잠시 쉬었다 가자”는 말에 반색하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불암산성의 성곽 흔적을 따라 오르니 어느새 첫 봉우리 정상부다. 안부 너머로 불암산 정상이 손짓한다. 능선을 타고 넘는 바람이 온몸을 흔들듯 몰아친다. 깔딱 고개가 시작되고 거북바위를 지나면 솔숲 흙길이 바위로 덮인 암반 등로로 바뀐다. 고도를 높여 정상부에 가까이에 놓인 계단을 한 발 한 발 밟아 오를수록 조망은 조금씩 점점 더 넓어지며 산정에 이르자 사방으로 장쾌한 뷰를 펼쳐 보인다.
조선 왕조 도읍지 한양의 남산이 되고자 금강산에서 달려왔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자리에 멈춰 섰다는 전설을 가진 불암산. 이 전설에는 "망아지는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 속담처럼 출세지향의 세태가 투영되어 있다. 비록 '서울의 남산'은 되지 못했지만, 한양 동북방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서, 태릉(泰陵) 강릉(康陵) 등 왕조의 능과 불암사(佛岩寺) 봉선사(奉先寺) 등 고찰, 그리고 불암산성 등을 품고 계절마다 많은 산객들이 즐겨 찾고 있으니 그리 서운해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위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해발 508미터 산정 정상부의 깃대 위에서 태극기가 쉬지 않고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 아래 비스듬한 너럭바위에 놓인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한동안 사방을 조망하며 숨을 고른 후 덕릉고개 쪽으로 향했다.
다람쥐 광장을 지나며 평탄한 우회 등로를 외면하고 암릉을 따라 오른 석장봉 위에 앉아 배낭 속 요깃거리로 허기를 달랬다. 짧은 암릉을 릿지 등반하듯 내려서니 완만한 흙길이 기다리고 있다. 등로 좌우의 소나무들이 흰 꼬리표를 하나씩 달고 있는데, 재선충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표시다.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최소한의 배려랄까.
덕릉고개로 내려서자 ‘수락산·불암산 누리길’ 안내판과 그 옆 백두산 제주도 알프스 태항산 후지산 장가계 산티아고 네팔 망산 알프스 등 국내외 명소 투어 광고지가 빼곡히 붙은 게시판이 산객들의 눈길을 잠시 붙잡는다. 이 고개는 산행 들머리에서 약 8km쯤 되는 거리이다. 문득 십여 년 전, 산행에 막 입문했을 무렵 친구들을 따라 불수종주_불암산 남단에서 수락산 북단까지 종주_에 나섰다가 이곳 덕릉고개에서 기진맥진하여 난감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그 수락산 정상이 3.5km 거리에서 손짓하고 있다. 둘레길을 뒤로하고 능선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발 374m 지점 철탑 부근 너럭바위에 올라서니, 지나온 불암산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단체 산행팀에게 길을 내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멀리 울창한 소나무 숲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코끼리바위 암봉이 눈에 들어온다. 도솔봉을 우측으로 감아 도니 그 후면에서 좌우 등로가 합류하며 치마바위로 이어진다. 족히 경사가 45도쯤 되어 보이는 10여 미터 높이의 치마바위를 손과 무릎으로 짚으며 기어올랐다. 그 위에 너럭바위에서 뒤돌아보니 거쳐온 불암산과 도솔봉이 짙푸른 숲 위로 암봉을 곧추 세우고 마치 열병식 하듯 줄지어 서 있다. 그 위용에 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수락산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해발 637미터 산정에 이르기까지 코끼리바위, 철모바위 등 화강암으로 빚어낸 거대한 자연의 조각작품들을 내놓으며 산객들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화강암이 풍화 침식되면서 다양한 기암괴석과 계곡 등 수려한 경관을 빚어 놓은 수락산 산행은, 비스듬한 너럭바위나 경사진 암벽 사이를 오르는 짧지만 짜릿한 릿지등산의 스릴과 함께, 까다로운 너덜바윗길을 헤쳐나가는 묘미도 남다르다.
산 정상부에는 많은 산객들이 정상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남기려고 길게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차례를 기다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수락산의 한자를 묻는 내 질문에 '水落山'이라는 정답 대신에 '秀樂山'이라는 잘못된 답을 주는 AI가 웃음을 자아냈다. 힘든 기색이 역력하지만 등로변 곳곳 전망 좋은 곳에 올라서서 탄성을 자아내며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산객들의 모습에서, 어쩌면 ‘빼어날 수(秀), 즐길 락(樂)’이라는 한자가 이 산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머리에서 약 13km를 걸었고 산행을 시작한 지도 6시간이 훌쩍 지났다. 암반길 산행에 발바닥은 화끈거리고 다리 힘은 풀어져 흔들린다. 일행은 홈통바위 기차바위 등 수락산의 명물들이 기다리는 코스 대신에 장암역 쪽으로의 짧은 하산 코스로 길을 잡았다. 정상부에서 급경사의 철계단을 내려서서 급전직하 가파르고 함한 너덜바위 등로를 따라 고도를 200미터쯤 낮추자, 마른 계곡이 다하고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내 모습을 보이는 가는 물줄기 계곡의 고인 물로 흥건한 얼굴의 땀을 씻어 내니 개운하기 그지없다.
하늘은 가늘게 비를 흩뿌리다가 멈추길 반복했고, 내려가기에도 힘겨운 그 길로 올라오는 산객들이 몇몇 스쳐 지난다. 부슬부슬 비가 뿌리는 날씨에 일몰 시각도 머지않은 늦은 오후에 산정으로 향하는 그 산객들의 용기가 가상하기도 하고, 산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는 않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기저기 골과 골의 물들이 모여들며 계곡의 물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크고 작은 폭포를 지나고 경사진 너럭바위로 흘러내리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처럼 우렁찬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들려주는 듯하다.
석림사와 노강서원(鷺江書院)을 지나 멀어지는 계곡 물소리를 뒤로하고 장암역으로 향했다. “막걸리 한 잔 해야지”라는 B의 제의에 따라, 좁은 식당가를 지나 역 근처 통일로변 식당으로 들어섰다. 뜨끈한 닭개장에 장수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불암산과 수락산을 잇는 힘겨운 종주산행의 마무리로서 제격이 아닌가? 전철 안에서 친구들과 작별하며 다음 산행을 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