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아직 잠에서 다 깨어나지 못한 주말이다. 집 밖으로 나서니 새벽빛이 드리운 아파트 숲 사이 하늘에 가느다란 그믐달이 미인의 눈썹처럼 고요히 떠 있다.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모란으로 향했다. 라디오에서는 세샘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이 흘러나오고 있다. 보사노바 리듬이 귀속으로 스며들며 아직 반쯤 졸린 내 몸의 리듬을 천천히 깨운다. 모란에서 8호선 전철로 갈아타고 남한산성입구역에 내렸고, 다시 버스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남한산성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너머로 어둠이 걷힌 맑은 하늘을 인 청량산과 검단산 능선이 가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남한산성 남문 쪽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볼 요량이다. 이른 아침 혼자만의 산행은 언제나 설렘과 고요, 그리고 느긋함이 함께 한다.
공원을 새롭게 단장하는 가림막이 등로 옆으로 높게 치켜세워져 있다. 공사 구간을 지나자 계곡 옆으로 새로 조성된 맨발황톳길, 그리고 ‘책 읽는 광장 도서관’이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 공중전화 부스 크기 시설 등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시설들이 눈에 띈다. 낯익은 듯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약사사로 향하는 갈림길 옆 사면에 돌탑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처럼 어른 키 높이로 서 있는 돌탑들은 마치 더 자라지 못한 꿈을 안고 서 있는 듯해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계곡 옆에 덩그러니 자리한 정자는 물소리를 친구 삼아 고독을 견디고 있는 듯 조금 쓸쓸해 보였다.
상도사와 덕운사의 갈림길을 스쳐 지나며, 마음에 이는 이즈음 두 사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애써 밀쳐냈다. 덕운사 갈림길 초입에 '건양대(健養臺)'라고 적힌 돌비석과 역기, 평행봉 등 운동시설이 새로 들어서 있다.
등로에는 산성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이따금씩 스쳐 지난다. 이른 새벽에 저들처럼 산을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면 때문일까 부지런한 까닭일까, 저만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탈진 등로를 떨어진 낙엽이 뒤덮고 있다. 산자락 비탈에 자리한 통일기원탑 군락은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고, '가을 관음 기도회' 플래카드가 걸린 관음사 앞 계곡 옆 비탈엔 소원탑 군락이 새로 자리를 텄다.
백련사 대웅전 앞에 "2026년 달력을 1부씩 가져가세요~"라는 글자가 적힌 박스 안에 달력이 가득 담겨 있다. 단기 서기 월별 일자가 음력과 함께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군더더기 없는 달력이다. 순간 발동하는 탐심을 내려놓고 팔각오층진신사리 석탑 앞을 지나 다시 등로로 내려섰다. 관음사 약수터를 비롯해서 서너 곳 약수터는 모두 '음용불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목구멍에 차오르는 가래를 한 번 내뱉었다.
하늘은 어느새 투명한 청자빛을 발하고, 작은 새들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하루를 열고 있다. 막바지 험한 비탈을 오르면 수십 길 축대 위에 산성의 남문 격인 지화문(至和門)이 버티고 서있다. 그 앞에서 오랜 풍상을 견뎌낸 470년 수령 느티나무가 수문장인양 늠름하게 버티고 서서 산객을 맞이해 준다.
지화문을 지나 성곽 위로 올라서서 반시계 방향으로 본격적인 환종주 트래킹을 시작한다. 잎을 떨군 갈참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고, 숭숭한 숲 빈 공간을 하늘이 채웠다. 능선을 따라 용이 몸을 비틀며 승천하 듯 유려하게 이어지는 성곽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제7암문 위로 올라서자 복원이 완료된 제1남옹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편에서 아침해가 찬란한 빛줄기를 쏟아내며 인사를 건넨다. 배낭에서 챙모자를 꺼내 쓰고 걸음을 옮긴다.
곳곳 깨지고 부서진 흔적이 눈에 띄던 성곽은 보수공사로 말끔히 새 단장을 했고, 바닥은 시멘트로 도포하여 유실을 막았다. 몇몇 곳에서는 여전히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산객 두어 분이 스쳐 지났을 뿐, 이른 아침 성곽길은 고요하다. 세계문화유산 성곽길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바닥 위로 주춧돌만 머리를 내밀고 있는 남장대 터를 지나자 동문인 좌익문 방향으로 평탄한 성곽길이 이어진다. 제3옹성을 지나자, 멀리 양수리 부근 한강이 산군 사이로 안개에 잠긴 채 몽환적 그림을 펼치고 있고, 동문 너머 제3암문 아래 자리한 망월사가 계곡에 파묻힐 듯 말 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성곽은 번천계곡 쪽으로 날 선 칼날처럼 내려 꽃힐 듯 급강하한다. 남한산성로와 번천 건너편 동문, 즉 좌익문(左翼門)도 해체 복원을 끝내고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11년 차인 남한산성이 해마다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좌익문 옆 장경사와 망월사 초입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니, 근심도 함께 비워진 듯 몸이 한결 가뿐하다.
동문을 기점으로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중 제4코스인 '옹성의 길'은 제3코스'인 승병의 길'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승병의 길 초입은 출가를 거쳐 온갖 번뇌를 떨쳐내고 해탈에 이르는 구도의 길처럼 아찔하게 가파른 오르막이다. 황진이 전설이 서린 송암정 터의 소나무는 정조대왕이 옥관자를 내려 '대부송'라 칭하였건만, 고사목이 되어 참나무와 넝쿨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천하일색 황진이(黃眞伊, 156?~?)도, 그녀가 놀다 가기를 청했던 청산리 벽계수도 모두 '일도창해(一到滄海)' 세월의 바다로 흘러가 버렸다.
탄금비천상(彈琴飛天像)이 들보를 장식한 장경사 일주문으로 들어섰다. 성곽 안쪽 망월봉 아래 넉넉한 터에 자리한 장경사는 1624년 남한산성 수축 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된 군막사찰이었다. 대웅전 무심당 범종각 향심당 삼성각 등이 마당의 10층석탑을 중심으로 다소곳이 모여 있다. 대웅전 뜨락에서 날렵한 몸매의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곁으로 다가와 땅바닥에 몸을 뒹굴며 이쁜 짓을 해 보인다.
요사채에 딸린 부엌에서는 김장무 다듬는 손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절집의 고요함과 사람 사는 냄새가 묘하게 어울리는 정경이다.
장경사에서 숨을 한 번 고른 성곽은 '산성의 길'로 들어서자 한바탕 다시 솟구칠 채비를 한다. 가지에 남아있던 나뭇잎이 한두 잎 바람에 떨어져 성곽길 위로 내려앉는다.
제2암문을 통해 본성 밖으로 빠져나와 장경사신지옹성(信地甕城)으로 내려서니, 아름드리 참나무 한 그루가 산객을 맞아준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가 저절로 웅얼웅얼 입속에서 흘러나왔다.
"성문 앞 우물 옆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지
가지에 새겨 놓은 수많은 사랑의 말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나를 반겨주던 곳"
햇볕이 따스히 내려쬐는 성곽 벽에 기대어 앉아서 옹성 너머 밀려들고 밀려 나는 파도처럼 멀리까지 번져 나간 산너울에 한동안 눈길을 주었다.
다시 성곽길로 올라서자, 한 무리 중년 여성들의 수다 소리가 동장대 터 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길을 채우고 있다. 동장대 터로 올라서자 성곽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며, 멀리 서울 시가지 너머로 삼각산과 그 긴 능선을 펼쳐 보인다. 아줌마 일행의 소녀처럼 들뜬 수다소리는 성 밖 남한산 벌봉의 봉암성 쪽으로 멀어져 갔다.
성곽은 군포지 터를 지나 전승문 쪽으로 급전직하 내려 꽂힌다. 한바탕 용트림하던 성벽이 잠시 숨을 고르듯 평탄해지는 지점에서 옥정사지 암문이 성 밖으로 길을 내어준다. 암문 밖에서 바라보는 성곽은 또 다른 장관이다. 북문 격인 전승문(戰勝門)으로 향하는 완만한 길은 서문과 수어장대로 뻗은 능선을 한눈에 펼쳐 보인다. 노송과 성곽이 양쪽에서 시립 한 그 길은 '사색과 희열의 길'이라고 이름해도 될 듯 운치가 있다.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솔숲 능선 위로 청자빛 하늘이 맑게 열려 있다. 황사로 흐릿하던 봄날이나 장마철 회색빛 여름의 하늘은 모두 아득한 옛적 일인 듯 느껴졌다. 탐방객들이 몰려 시끌벅적한 행궁 쪽에서 반듯한 산책로가 이어진 전승문을 뒤로하고 연주봉 암문도 지나쳤다. 서문이라 불리는 우익문(右翼門) 문루 부근은 서울 동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름난 조망 지점이다. 서문에서 수어장대에 이르는 너른 성곽길은 평탄하고 조망이 좋은 탓에 여느 때처럼 많은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다.
병풍바위를 지나 수어장대에 올랐다. 청량산 정상부에 우뚝 선 수어장대 누각을 배경으로 단체 나들이객들이 인증숏을 남기느라 자못 소란스럽다. 수어장대는 남문인 지화문까지의 약 1km의 내리막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는 성곽길 환종주의 막바지 기점이다.
남문으로 향하며, 인적 없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춘정에 올라 난간에 걸터앉아 배낭 속에서 단팥빵과 밀크티를 꺼내어 허기를 달랬다. 환종주의 출발 지점이었던 남문으로 내려서며 오늘 산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성문 안 산성마을 도로에는 차량의 행렬이 꼼짝도 않고 길게 늘어서 있다. 짧게 머물다 사라져 버릴 가을빛을 붙잡아 보려는 애틋한 마음들이 아니겠는가!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