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화단의 라일락이 꽃을 피웠다. 사월 어느 날 아침에 화들짝 피었다가 툭툭 허망하게 떨어지는 목련은 왠지 슬퍼 보이지만 향기로운 내음이 있는 라일락이 목련을 대신해서 위안을 준다.
조선시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거리 도보 노선인 영남대로, 그중 경기도 구간의 원형을 바탕으로 조성한 역사문화 도보탐방로가 영남길이다. 작년 초부터 총 116km 10개 구간을 한 두 구간씩 나누어 걸었는데, 전 구간 탐방을 끝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제5구간에 이어 마지막 제1구간을 남겨두고 있다. 영남길 퍼즐 완성까지 이젠 한 조각만 남은 셈이다.
영남길 걷기 나머지 그 한 개 구간 마무리를 위해 청계 옛골을 향해 집을 나섰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보기에도 좋을 듯싶다는 생각이다. 매사에 끊고 맺음이 중요하니까. 올봄에도 어김없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눈 주위가 부은 듯 거북하고 멀쩡하던 코에서는 콧물이 나고 콧속도 근질거린다.
오일장이 서지 않은 날 일요일 이른 아침의 모란역 주변은 한산하다. 11-1번 마을버스는 올드보이 올드 걸 승객들을 빈자리 없이 태웠다. 고등동, 상적동, 청계 옛골을 지나 금토동까지 가는 버스이니 청계산 산행을 나선 분들이 대다수일 터이다. 삐걱삐걱 덜컹덜컹 달리는 버스는 정거장에 섰다가 출발할 때마다 힘에 겨운 듯 엔진 소리가 거칠다.
옛골 마을에 내려 영남길 제1구간 '달래내 고갯길'의 출발점에 섰다.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옛골마을과 금토동을 지나는 고개로 오누이에 얽힌 슬픈 설화가 전해오는 달래내 고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서울과 성남의 경계가 되었다.
영남길 시작점을 알리는 상적동 옛골마을의 안내판
영남길 안내판 주변에 쓰레기봉투가 널브러져 있어 보기 불편하다. 멀리 청계산 이수봉 주변 능선은 안개를 잔뜩 머리에 이고 있다. 산업 대동맥 고속국도 제1호선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난 도로를 따라 걷다가 천림산 봉수터 쪽 청계산 자락으로 올라섰다. 봉수지 터에서는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공사 터를 우회해서 청계산 철쭉능선을 따라 오른다.
청계산은 곳곳에 봄꽃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나무들도 연초록 새잎을 틔웠고 산새들은 수다쟁이처럼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앞서 능선을 오르는 노부부 한 쌍이 길 가 바위틈의 철쭉이 틔운 잎사귀를 들여다보며 감탄사를 토해낸다.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콧물을 풀어내며 꽃대궐 길을 걷는다. 진달래꽃은 물방울을 이고 있고 꽃을 떨군 진달래가 꼿꼿이 세운 잎사귀들은 유럽 어느 도시 대성당의 촛대처럼 기품이 있다.
영남길은 이수봉 바로 아래 능선에서 금토동 능안골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내리막길 능선 비탈에 참나무 고목들이 베어져 토막 나 있다. 굵은 참나무는 밑동 나이테 한가운데 검은 흠집을 품고 있다. 사람도 누구나 저 참나무처럼 아픔 하나쯤은 가슴에 안고 있을 것이다. 흠집이나 아픔은 모진 세월을 견뎌 왔다는 증표이자 어쩌면 자랑스러워할 훈장이나 다름없다.
흙으로 덮인 육산인 청계산은 걷기 편하지만 길 위에 젖은 낙엽이 깔려 있어 더욱 푹신하고 걷기 수월하다. 과천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관악산과는 서로 개성과 특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무거운 구름을 잔뜩 드리운 하늘은 송곳으로 그 한쪽을 툭 찌르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물풍선 같다. 금토동 쪽으로 내려서는 길은 인적 하나 없고 재잘대는 산새들 얘기 소리만 들리는 호젓한 길이다.
금토동 능안골로 내려섰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 <고향의 봄> 가사에 나오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계산 자락에 안긴 한적한 산골 같던 이곳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닥쳐서 산자락 가장자리마다 구획을 짓고 경계를 가르는 철망이 둘러쳐져 있고, 포클레인은 땅을 들쑤셔 파고 있다.
봄꽃이 만발한 청계산과 금토동
금토천과 나란히 난 길을 따라 내려왔다. 둔투리 노인회관은 인적이 없고 개복숭아 꽃이 유난히 예쁘게 핀 H농원 농부의 손길은 분주하다. 머지않아 골 안쪽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앞쪽으론 판교 제2 테크노밸리가 들어설 것이란다. 좁은 도로를 차량이 쉼 없이 번잡하게 오가는 연유가 짐작된다.
머리 위로 경부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외곽순환도로가 교차하는 판교 IC 밑 금토천을 따라 걷는 길은 내달리는 차량 소음으로 귀가 따갑다. 교각이 늘어선 다리 밑을 지나서 반듯하고 세련된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 테크노밸리 빌딩 숲으로 들어섰다. 혁신을 꿈꾸는 이노밸리 빌딩 숲의 그늘 쉼터에 앉아 과일과 음료로 허기를 달랬다.
컴퓨터 기판처럼 도로망이 얽히고설킨 판교 IC 부근에 판교박물관이 자리한다. 지상과 지하 각 1층씩의 아담한 이 박물관에는 판교 신도시 개발 때 발견된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돌 찌르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백제와 고구려 시대의 돌방무덤과 유물, 고려와 조선 시대의 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탄천 보도와 판교 빌딩군
삼평동, 백현동, 판교동, 등 판교 일대의 역사가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뿐 아니라 신석기와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경이롭다. 문화해설사 H님의 해박한 설명을 듣다 보니 작은 박물관에 한 시간이나 머물렀다.
허허벌판 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청계 고개를 넘던 일이 어제 같은데, 불과 십 수년 사이에 빌딩과 주택, 도로, 공원이 들어선 온전한 도시 모습으로 변했으니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경부고속도로 위로 난 육교를 건너고 하천, 숲, 놀이시설 등이 잘 갖추어진 화랑공원과 판교 테크노파크 공원을 지나서 봇들 저류지 공원 부근 개나리교에서 제1구간의 여정과 함께 영남길 10개 구간 대장정의 끝을 맺었다. 2019-04 L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