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동의, 주거 계약, 유언장 작성

함께 살아도 법은 모른 척할 수 있다

by 라온재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동거인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고 상상해보자. 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보호자를 찾을 때, 아무리 서로를 내 사람이라 여겨도, 법적으로 동거인은 가족이 아니다. 아무런 권한이 없는 외부인일 뿐이다. 그 결과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응급수술 동의 불가, 연명의료 결정 불가, 회복 후 치료 방향 논의조차 배제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문제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전 의료 결정 문서다. 대표적으로 의료결정 위임장(Durable Power of Attorney for Health Care)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가 있다. 이 문서를 통해, 본인이 동거인을 의료적 의사결정의 대리인으로 지정할 수 있다. 이 서류는 반드시 서면으로, 공증을 거쳐 작성해야 하며, 병원 시스템에 미리 등록해두면 실제 상황에서 즉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준비는 가족이란 법적 경계 너머에서도 실질적인 돌봄 관계를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황혼의 계약 동거에서는 함께 산다는 그 자체가 늘 법적 보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주거 공간이 한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을 경우, 동거인이 추방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명의자가 사망하거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경우, 법적으로 거주 권한이 없는 동거인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동거인이 전입신고와 임대차 계약서에 명시되는 것이 중요하다. 혹은 공동명의로 주택을 구입하거나, 사용권한에 대한 별도의 계약서를 작성해두는 방법도 있다. 한편 소유주가 유언장을 통해 해당 공간의 거주 권리를 일정 기간 보장한다고 명시할 수도 있다. 법은 명확한 문서만을 인정하며, 동거인의 진심이나 희생은 기록되지 않으면 무효다.


또한 요즘은 주거 공유 계약서라는 이름으로 동거인의 거주권을 일정 기간 보장해주는 표준 양식도 존재하니, 이 역시 활용해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황혼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유언장은 죽음을 준비하는 문서가 아니다. 함께한 시간을 존중받기 위한 마지막 정리다. 특히 법적 혼인이 아닌 계약 동거의 경우, 유언장이 없다면 동거인은 어떠한 상속도 받을 수 없으며, 주택, 예금, 물건 하나에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그동안 쌓아온 추억과 삶의 기반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유언장은 자필로도 작성 가능하지만, 공증을 받거나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 작성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유산의 일부를 동거인에게 명확히 남기고 싶다면, 해당 내용을 정확히 서술하고 증인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녀나 친인척에게도 그 의도를 미리 알리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다.


나아가 장례 방식에 대한 결정권도 유언장을 통해 미리 정해둘 수 있다. 병상에서 마지막을 함께한 이가 장례 절차에 참여조차 못하게 되는 현실은, 관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여전히 협소하다는 증거다. 법이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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