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중요한 건 마음인가, 계약인가?

by 라온재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마주한 인연, 서서히 쌓여가는 신뢰, 나누는 밥상과 침묵 속의 동행. 황혼의 동거 역시 다르지 않다. 결혼이라는 무거운 틀 없이도 따뜻한 정과 상호 배려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충분히 의미 있고, 때론 결혼보다 더 깊은 결속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꼭 계약까지 해야 하나요? 서류가 없으면 우리의 관계가 진짜가 아닌가요?

그 물음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외면한 감정의 울림이기도 하다. 마음만으로 충분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병원, 금융기관, 행정 시스템은 감정이 아니라 기록과 자격을 요구한다. 동거인은 법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는 타인이며, 아무리 서로를 인생의 반쪽이라 불러도, 한 줄의 문서가 없으면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는다.


계약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사랑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계산적인 것, 불신의 표현, 혹은 사랑을 조건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계약은 감정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구조다.


특히 황혼기의 계약 동거에서 계약은 서로의 믿음을 보완해주는 도구다. 자녀, 재산, 건강, 간병 등 너무 많은 현실의 변수들이 존재하기에, 감정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 계약은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약속을 문서화하는 일이다. 나는 당신을 삶의 파트너로 존중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계를, 책임을, 권리를 미리 정리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계약이 있을 때, 오히려 더 자유롭고 안정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감정의 충돌이 생겨도 우리가 미리 합의한 내용이 기준이 되어 감정의 파고를 넘을 수 있고, 외부의 시선이나 가족과의 갈등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이냐 계약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건강한 계약은 진심을 담은 마음 위에 쓰여야 한다. 문서만 있고 신뢰가 없다면 그 관계는 위태롭고, 마음만 있고 아무런 구조가 없다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계약 동거는 결혼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책임을 나누는 선택이다. 법적 혼인이라는 제도가 무겁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자율성과 유연함 속에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관계의 틀이다. 그래서 마음이 계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이 마음을 보호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황혼의 삶은 두 번째 인생이다. 그 인생을 누구와 어떻게 설계할지는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현실의 장치와 감정의 깊이 모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법과 마음은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서로를 완성해주는 관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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