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9년, 마흔 중반을 넘긴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늦은 이민이었다. 아이들의 교육과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낯선 땅에 발을 디뎠지만, 그 선택이 인생을 얼마나 바꾸게 될지 처음엔 몰랐다. 영어도 자유롭지 않았고, 사회적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삶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여러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조금씩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은퇴를 앞두고 돌아보면 미국에서의 삶이 나에게 준 선물들이 참 많았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자유였다. 겉으로 드러난 민주주의의 제도적 자유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체감되는 선택의 자유가 참 컸다. 누구도 내 옷차림이나 직업, 나이, 결혼 여부, 자녀의 학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않는다. 나답게 살아도 된다는 분위기,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회의 여유, 내 인생의 방식이 틀린 게 아니라는 인정. 그것이 내가 미국에서 얻은 가장 큰 자유였다.
또 하나 크게 다가온 건 평등이었다. 물론 미국 사회도 인종차별이나 계층 갈등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일상에서 사람을 나이, 지위, 출신으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이민자인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병원, 관공서, 식당, 직장 등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고, 직급보다는 역할과 책임으로 소통하는 문화는 신선했다. 나도 존중받는 구성원이라는 느낌은 이민자로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품는 사회다. 피부색, 언어, 종교,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각자의 차이를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공립학교에서 여러 인종과 문화권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자라는 모습을 보면, 세상의 넓이를 자연스럽게 배워간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병원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며, 이민자이면서도 이민자를 이해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미국 사회는 개인의 사생활과 선택을 존중해준다. 내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든,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누구를 사랑하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을 조용히 영위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왜?라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는 점, 그것이 나에게는 진정한 ‘존중’으로 다가왔다. 사생활을 지켜주는 문화, 조용히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대신 공간을 내어주는 태도는 이민자로서 편안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가능성의 땅이다. 젊은 시절이 아니어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나라다. 나처럼 중년의 나이에 간호학을 공부하고, 면허를 취득해 일하게 된 사람도 많다. 나이에 관계없이 배우고, 일하고,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은 이민자에게 늦은 시작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이라는 희망을 준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면허를 따고, 병원에서 일하며 가족을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회 구조 덕분이다.
물론 미국 생활이 마냥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 장벽, 문화 차이, 외로움, 경제적 부담, 사회 시스템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민자로서 살아온 지난 10여 년을 돌아보면, 미국은 나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었고, 나의 존재를 존중해주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다. 미국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은 나라지만, 이민자의 삶을 존중하고, 그 가능성을 믿어주는 나라라는 점에서, 내가 선택한 이민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