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은 단순히 국경을 넘는 일이 아니다. 삶의 방식, 언어, 인간관계, 가치관, 심지어 자존감까지 바꾸는 깊은 전환이다. 나는 2009년, 가족을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다.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난 10여 년을 돌아보면 미국 사회가 마냥 이상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외면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복잡한 현실은 때로 나를 지치게 했고,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가장 먼저 부딪힌 건 언어 장벽이었다. 기초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일상의 뉘앙스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말을 못한다는 건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차단된 듯한 느낌이었다.
모임에서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나의 의견이 전달되지 않을 때, 나는 서서히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민자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 머무른다. 인종차별은 생각보다 일상적이고, 직장 안에서도 미묘한 차별이 존재한다. 환자나 동료가 나를 한국 간호사, 아시안이라는 프레임으로 먼저 판단하고, 내 말보다는 억양이나 피부색에 집중할 때, 나는 여기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진 않는구나 하는 씁쓸함을 느낀다. 명확한 차별보다 더 지치는 건, 미묘하고 교묘한 거리감이다. 또한, 미국 사회는 철저히 개인 중심적이다. 자유롭고 간섭받지 않는 대신, 고립되기 쉽다. 이웃과 왕래가 드물고,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서적 유대가 강한 한국 사회에 익숙했던 나는, 이곳의 거리감 속에서 종종 외로움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라는 원칙은 냉정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약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족도 이민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의료비는 상상 이상으로 비싸고, 보험의 혜택은 복잡하며 제한적이다. 실수 한 번으로 큰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구조는 늘 불안감을 동반한다. 교육 시스템 역시 균등하지 않다. 거주 지역에 따라 공교육의 질이 천차만별이고, 사립학교나 과외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기회는 열려 있지만, 그 문턱은 생각보다 높고, 자본의 영향력은 크다. 노동의 가치에 비해 삶의 질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도 실망스러웠다. 밤낮으로 일해도 여유롭지 않은 생활, 병원이라는 스트레스 많은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소모하게 만든다. 고된 일을 하며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가족과의 거리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부모님이 아프거나 돌아가셨을 때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한 죄책감, 조카들의 성장이나 가족 행사에서 소외되는 슬픔은 이민자의 그림자와도 같다.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나 있었던 만큼, 다시 돌아간다 해도 완전히 속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이민은 선택이었지만, 때로는 선택하지 않은 고립의 연속이었다. 가능성과 자유를 좇아 떠나왔지만, 그 대가로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일 수 있지만, 동시에 차가운 땅일 수도 있다. 이민자의 삶은 그 양면을 모두 견디는 인내의 연속이며, 그 속에서 나는 어느새 더 단단해졌지만, 때때로, 너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