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은퇴자들에게도 은퇴란 항상 자유와 여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느 날 병원에서 청구서를 받아들고, 매달 모자라는 생활비를 카드로 메우다 어느덧 벗어날 수 없는 부채의 늪에 빠지는 노년들. 사실 미국에서 은퇴 후 파산을 신청하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1991년 전체 파산 신청자의 2.1%에서 최근 12.2%로 5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내 주변의 한 이웃도 오랫동안 성실히 살았지만, 은퇴 후 반복되는 병원비와 처방약 값, 늘어가는 생활비에 신용카드 빚이 쌓여 결국 파산을 신청하게 되었다. 미국은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과 401(k) 등 여러 은퇴 소득원이 있지만, 의료비나 장기요양비용, 그리고 불안정한 투자 수익으로 인해 불안이 커진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일하며 저축을 해도 한 번의 큰 의료비나 장기간의 요양이 필요해질 경우, 평생 모은 자산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일이 적지 않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노인 빈곤율 OECD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혹독하다. 한국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약 40%에 달한다. 국민연금이 1988년에 도입되어 아직 충분한 수령 자격을 갖추지 못한 고령자가 많고, 그나마 연금액도 생활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노인을 부양하던 관습은 빠르게 약화되고, 고령자 중 상당수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전체 개인파산 신청자 중 43.4%가 60세 이상 고령자였다고 한다. 고령층의 파산 비율은 미국보다 훨씬 높다. 나는 한국에 계신 친척 어르신들이 국민연금으로 한 달을 어렵게 버티는 모습을 자주 듣는다. 일용직이나 청소, 배달 등으로 노후를 이어가는 분들도 많다.
파산을 신청하면 모든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파산으로 채무 일부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이후 신용점수 하락과 주택·자동차 등 자산 상실,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파산 후 신용불량자로 분류되어 금융생활이 어렵고, 기본적인 주거·의료·생활비조차 마련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노후의 마지막 안전망이 무너지는 순간, 삶은 다시 불안정해진다. 가족의 지원이 약화된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미국과 한국 모두 고령자 파산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원인은 다르다. 미국은 의료비 부담과 부채, 연금제도의 변화(확정급여에서 확정기여로의 전환), 그리고 일부 학자금 대출까지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다. 반면 한국은 불충분한 공적 연금과 높은 노인 빈곤율, 가족 부양 문화의 해체가 주요 원인이다. 미국 고령자의 파산 비율(12.2%)도 심각하지만, 한국의 고령자 파산 비율(43.4%)은 사회 안전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는 두 나라의 은퇴자 파산 사례를 볼 때마다 노후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일생 동안 일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노년에 경제적 위기에 내몰리는 현실.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결국 젊을 때부터의 철저한 준비와 함께, 사회 전체가 안전망을 더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남는다. 아직 늦지 않았다. 각자의 삶의 궤적에서, 내일을 위한 작은 준비와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 자신의 노후를 위한 설계도 다시 점검해본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