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그가 감독한 두 번째 시대극으로, 전기영화이면서도 전통적인 시대극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20세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오펜하이머를 다룬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고, 그가 살아낸 시대와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놀란 감독은 복선이 되는 장면과 대사를 곳곳에 배치하여, 관객들에게 과학과 정치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 빗물이 웅덩이에 떨어지는 장면과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은 과학적 파장이 퍼지는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오펜하이머의 세계관과 맞물려, 과학이 불러오는 결과와 그에 따른 정치적 반응을 연결짓는다.
영화의 여러 대사들이나 장면들 역시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주제의 일관성을 강화한다. 스트로크 제독이 "입증 책임이 없는 보안인가"라고 말하는 장면은, 나중에 청문회에서 그가 다시 입증되지 않은 공격을 받는 장면과 대비된다. 이는 과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논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로서 직면한 갈등을 더욱 강조한다.
오펜하이머의 과학에 대한 접근법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모든 의견을 들어야 진보할 수 있다"는 그의 대사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이는 영화 속 캐릭터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오펜하이머는 처음에는 진 태트록과 만나지만, 후에 키티와 결혼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진 태트록은 단단해 보이고, 키티는 흔들리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두 사람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진 태트록은 원초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키티는 사건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응하려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오펜하이머가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는 사람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특성을 존중하면서도,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특히 키티라는 캐릭터는 흥미로운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한때 생물학자였지만 현재는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키티는 과학의 길을 떠났지만, 여전히 과학을 존중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오펜하이머의 보안인가 심사에서 증인으로 등장하고, 오펜하이머가 텔러의 악수를 거부하는 장면은 과학과 정치의 경계를 보여준다. 텔러는 오펜하이머를 불안정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평가했지만, 그의 의견을 배척하지 않고 정직하게 표현한 점에서 과학적 성격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주제다. 정치인들은 과학을 이용해 수소폭탄 개발에 집중하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과학이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장면에서 과학이 정치의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정치와 과학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색상으로도 구분된다. 오펜하이머가 등장하는 장면은 컬러로, 스트로크 제독이 등장하는 장면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과학과 정치의 차이를 시각적으로도 강조한다. 과학은 정확성과 논리성에 기반을 두고, 정치의 언어는 융통성과 관계를 중시하는 점에서 두 분야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조언을 구하며, 과학적 이론의 상반된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과학이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시스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한 이유를 과학이 의견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그가 과학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상의 모든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에서 스트로크 제독은 "권력은 태양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정치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정치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영화에서 핵폭탄 투하를 둘러싼 정치적 결정은 이분법적인 선택을 내리는 정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트루먼 대통령의 대사에서 보듯이, 정치는 "죽일 것인가, 죽이지 말 것인가"와 같은 단순한 선택을 강요한다.
핵폭탄의 투하는 단순한 군사적 결단이 아닌, 정치적 리액션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핵폭탄 투하는 상대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핵폭탄은 이미 예상된 반응을 차단하고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정치적인 의사결정의 전형적인 예시로, 생존과 이익을 위해 벌어지는 정치적 싸움을 상징한다.
결국 영화는 과학과 정치, 그리고 그들 간의 연쇄작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이 만들어지고 투하된 이후, 정치적 반응이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핵의 확산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민한다. 그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투하 이후, 자신이 만든 무기가 결국 자신과 그의 가족, 친구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결말에서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로모스와 물리학이 함께한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가 바랐던 현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과 정치가 서로 얽히는 세상에서, 그는 결국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는 결국 과학적 성취가 초래하는 파장과, 정치적 리액션이 만들어내는 연쇄반응을 통합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과학과 정치는 서로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오펜하이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깊은 회한과 반성은, 그의 과학적 업적이 가져온 무게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