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의 표출과 마크 로스코의 공유
윤형근과 마크 로스코, 마치 이란성쌍둥이 같은 두 화가.
윤형근과 같이 언급되는 화가는 단연코 마크 로스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78년 프랑스 파리(Galeries The Nationales du Grand Palais)에서 진행된 제2회 파리 국립현대미술제(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에서 프랑스의 평론가들은 윤형근의 작품과 로스코의 작품이 유사하다며 로스코의 작품 세계에서 윤형근의 작품이 나온 것이라고 평했다. (한국일보 1978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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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태어난 국가, 접하고 자란 문화와 시대의 분위기도 다르고 교류가 없던 두 사람의 작품이 유사한 것은 마치 밀레와 고흐의 유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밀레의 작품을 보지도 못했음에도 밀레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작업을 하다 보니 그와 유사한 작품을 제작하게 된 고흐와 윤형근의 작품이 비슷한 맥락일까?
윤형근이 로스코의 작품을 실제로 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지만, 미국에 진출했던 김환기의 제자라는 점과 일종의 트렌드적 화풍이었던 단색화, 추상표현주의 회화, 앵포르멜, 모노크롬 회화 양식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밀레의 작품과 유사성을 보이는 고흐와는 다르게 윤형근이 로스코의 영향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은 것은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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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사람의 작품의 형상이 유사할 뿐, 작품에 담긴 정신은 다르다.
윤형근은 다소 혹독했던 시대 속에서 분노를 느껴 그러한 감정, 한과 울분을 담아내어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다.
로스코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와 삶에 대한 회의감과 복잡한 단상을 담아내고 그러한 생각을 감상자와 나누고자 했다.
누군가는 분노와 울분을 “표출”하고자 했고 누군가는 인간사에 대한 단상을 “공유”하고자 했다.
“표출”과 “공유”
표출은 사전적 의미로 속에 있던 것을 겉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공유는 사전적 의미로 정보와 의견, 감정 따위를 나눈다는 것이다.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표출을 통해 그의 감정을 느낀다면 결과론적으로 그것은 공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마치 두 화가는 닮은 듯 닮지 않은 면을 또 한 번 보여준다. 그렇지만 두 화가의 차이는 “공유”라는 결과를 표방했는가, 그것을 지향하여 작업하였는가, 중점을 둔 것이 무엇인가의 차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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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그들이 버텨낸 세월의 깊이는 다르지만, 그들이 보여주고 담아내고자 한 그 복잡하고도 사뭇 어두운 감정들은 현시대에도 개개인이 종종 느끼며 사는 감정과 생각이라는 점에서 꾸준히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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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감정의 표출을 행한 윤형근의 작품이 오히려 감정의 공유를 표방한 로스코의 작품들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일종의 일방적인 표현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화가의 울분과 같은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그런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윤형근의 작품이 주는 무게감은 로스코의 작품과는 또 달랐다는 것, 그것 하나는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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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름에 들어설 무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는 “윤형근의 방”이 마련되었다.
어두운 조명, 로스코의 작품과 닮은 듯한 윤형근의 작품들, 전시장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른 전시실들과는 다르게 침묵하고 묵념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이는 윤형근의 방은 마치 일본의 가와무라 미술관에 있는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 방”과 굉장히 유사한 분위기를 보인다.
작품에 담긴 정신은 다르지만 두 화가의 방은 그 안에 들어선 감상자에게 주는 무게감이 묵직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절로 묵념하게 만드는 공간적 특성이 이런 것일까. 백색소음이라는 단어도 있는 현시대에 두 화가의 방은 감상자에게 그 어떠한 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은 고요함을 표방하고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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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침묵을 통해 얻는 것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유를 원한다면, 고요함을 통해 사색을 하고자 한다면 바쁜 도시에서의 삶 속에서 가와무라 미술관의 로스코 방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윤형근 방은 가장 가까이 도피할 수 있는 하나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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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방이 일시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예전에 소논문으로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꺼내어, 제 생각과 마음을 더해 새롭게 풀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