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사회적 메시지의 경계
Arthur Jafa의 <The White Album>(2018)
“Black lives matter” 이 문구는 몇 년 전에 사회적으로 이슈 되었던 것이다. 전 세계인의 대다수가 인권을 위해, 개개인의 존재를 위해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와 같은 것을 통해 검은색 이미지와 이 문구 하나만을 게재함으로써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SNS에 접속하면 이 문구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흑인 인권을 위한 움직임은 있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과 관련한 다양한 퍼포먼스, 조각, 회화 예술 작품등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시에 후기 식민주의와 관련한 논쟁이 대두되고 있었다는 것과 수사학이 재평가되면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대립이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이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2021년에 이루어진 “Black lives matter”의 움직임과 현재 그리고 과거의 흑인 인권과 관련한 문제는 바뀐 것이 있는가. 매체의 발달로 하나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 과정이 좀 더 수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의 발달로 부당한 일을 당하는 그 사례, 즉 질적인 측면에서는 더 극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백인, 흑인, 동양인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예를 들어 같은 미국 출생이어도 피부색의 차이로 차별과 혐오범죄는 만연해진다. 동양과 흑인은 백인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에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가 아서 자파(Arthur Jafa, 1960)의 작업은 현대에 가장 친근한 소재로 인종 문제를 꼬집는다. 그는 기술을 활용한 영상 작업을 주로 한다. 그것들은 아서 자파가 항상 언급하는 ‘흑인음악의 힘, 아름다움, 소외’를 수반하는 흑인 이미지와 비디오 시퀀스로 조합하여 재조립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지를 수집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미지는 하나의 기록이다. 특정한 주제로 이미지들을 모아서 펼쳐보았을 때에 변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일일까 부정적인 일일까. 그 내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서 자파는 뉴스, 책, 잡지, 인터넷의 이미지 등을 아우르며 흑인 문화가 현대에 어떠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는지, 일종의 선입견이 내포된 이미지들을 모았다. 즉, 사회가 틀을 만들어 “흑인은 이런 문화를 가진다”라는 선입견을 강화시킴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서 자파의 <화이트 앨범 The White Album >(2018)은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작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비틀스 앨범과 조앤 디디안(Joan Didion, 1943)의 에세이와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제목으로 작품은 백인성(Whiteness)이 무엇인지 꼬집는다. 40분 동안 진행되는 이 영상은 온라인에서 수집한 뮤직비디오, 핸드폰으로 촬영된 영상, 다큐멘터리, 뉴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촬영한 짧은 클립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을 연상시키듯 총을 꺼내드는 백인 남성,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33건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딜런 루프(Dylann Roof)와 관련된 영상과 사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에는 다양한 장면이 단편적으로 빠르게 지나가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되도록 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흑인의 모습은 없다. 그저 수갑을 찬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 경찰에게 ‘nigga’라고 외치며 욕설을 퍼붓는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적인 행동과 사고를 비아냥되듯 래퍼 플라이스(Plies)의 유명한 밈(Meme)인 “당신 나랑 논쟁하고 싶어?(I cannot argue with you)”가 재생된다. 무게감 있고 섬뜩한 영상들 사이사이에 이러한 밈과 흑인 스트리퍼, 레게 문화를 따라 하는 백인 고트족 등의 모습은 영상으로 인해 발생되는 긴장감, 불편감, 거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영상들과 사진들이 모여 백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과연 백인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차별의 근거로 두는 것은 시각적인 속성, 즉 피부색이다. 이에 따라 경멸할 대상을 선정하고 그들 스스로의 우월 의식의 고취가 일어난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은 진정 백인일까.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 1948)는 이에 기시감을 더하는 <궁지에 몰린 Cornered >(1988)이라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흑인 부부 사이에서 백인의 피부를 가진 아기가 태어난 사례가 존재한다. 이처럼 인종이란 현재의 시각적인 속성 하나만으로 구별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서 자파의 작업은 에이드리언 파이퍼와 같이 직접적으로 백인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은 아니지만, 전작인 <사랑은 메시지이고 메시지는 죽음이다 Love is the Message, the Message is Death >(2016)에서 광범위한 동시대 이미지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내용을 다루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보인다.
“과연 흑인성은 무엇이고 백인성은 무엇이기에 그들은 우월 의식을 가지는 것인가”
현재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지속되고 있다. 그 정도가 개개인에 따라 다를 뿐 절대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점에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사망에 이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서 자파의 작업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1970년대부터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과연 바뀐 것이 있었나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21세기 매체의 발달로 누군가 영상과 사진, 행위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수월해졌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이 없다면 그 목소리 또한 묻히고 말 것이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사회적 운동인가와 같이 경계를 나누는 것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회적 운동은 하나의 예술로 환원될 수 있으며 예술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흑인이 아니기에 그들이 겪은 인종차별에 대해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따른 혐오범죄의 수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아서 자파의 작품은 백인성에 의문을 던지기에 흑인이 아닌 백인에 초점을 둔 것 같지만, 결국 흑인 인권으로 귀결되며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 본질이다.
그렇다면 흑인을 동양인으로 바꾸어 작품을 바라보자. 정말 그릇된 것은 무엇일까. 백인의 뿌리 깊은 우월주의 의식일까 아니면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그들의 차별적인 태도일까. 아서 자파의 이 작품은 백인이라는 외적인 속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일 수 있다.
끝으로, 아서 자파의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감에도 무분별한 차별적인 폭력이 지속되고 있기에 특히 작품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데에 있어서 대중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작품 및 작가 인터뷰 :
아서 자파의 <화이트 앨범 The White Album >(2018)의 일부
-> https://youtu.be/6NBQzglpkIo?si=jo1YFTy_KCAqu3X0
아서 자파 <사랑은 메시지이고 메시지는 죽음이다 Love is the Message, the Message is Death >(2016)의 일부
-> https://youtu.be/iRPVvzwfR68?si=nzia3WB0RzPT-Grz
-> https://youtu.be/lKWmx0JNmqY?si=76uni7WNE9BDNRdG
에이드리언 파이퍼의 <궁지에 몰린 Cornered >(1988)
-> https://youtu.be/KphHf5mLmEU?si=FXEEg4OycbaJEma2
아서 자파의 인터뷰
-> https://youtu.be/KrJXLDD_r3o?si=779lcY_w0LK_Kjlt
2020년에 소논문으로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꺼내어, 제 생각과 마음을 더해 새롭게 풀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