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범, 김경민, 아비람 라이케르트의 협주곡 특집
오늘은 참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피아노 콘체르토 페스타
"콘체르트 페스타"라는 이름을 달고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콘체르토들을 한데 모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이하 베피협 5),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하 차이콥 1),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하 라흐 2)을 연주한다는 점부터 언뜻 봤을 때부터 화려했지만, 직접 청중으로서 겪어보니 더욱 흥미로웠다. 최영선이 지휘를 맡은 이번 공연에서는 지난 1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손정범씨가 베토벤을 연주했고,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김경민씨가 차이콥스키를, 이스라엘계 미국인으로서 현재 서울대 음학대학 기악과 교수직을 임하고 있는 아비람 라이케르트가 라흐마니노프를 맡게 되었다.
1순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Op. 73
<황제>
유감스럽지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모호한 수준의 연주였다. 먼저 오케스트라가 그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황제 협주곡의 웅장하고 화려한 소리를 확실한 전달력을 가지고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1악장(Allegro) 은 중요한 악장이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거의 동시에 들어가며 강력한 제시부를 던지는 파트다.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마치 스피커로 치면 음량을 75퍼센트 정도로 맞춰놓은 듯한 소리였다. 그다지 다이내믹하지도 않았다. 파워가 부족한 오케스트라를 제쳐놓더라도, 직관적으로 봤을 때 협연자 또한 아직 연습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무대에 오른 듯 보였다. 몇번의 미스터치가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히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나마 1악장과 3악장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가 받쳐주지 못해 그리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지라도 2악장(Adagio un poco mosso)만큼은 확실히 솔리스트 특유의 풍부한 감성으로 정제되고 아름다운 연주를 보여줬다는데 동의할 수 있겠다. 손정범은 확실히 작은 소리를 탁월하게 잘 내는 연주자다. 양적인 연주자라기보디는 질적인 연주자랄까.
2순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Op.23
김경민씨의 차이콥 1번은 앞선 베피협 5번에 비해 되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강력하고, 무언가 선물을 건네는 듯한 인간적인 연주였다. 물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다른 파트를 연주하며 십 몇초 가량 헤메는 헤프닝은 보기에 상당히도 경악스러웠지만, 전반적으로 막 학부를 졸업한 연주자에게서 그런 깊은 소리와 감정이 나올 수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것이 신선한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내가 학부 졸업생을 너무 우습게 봤던 건가?)
((원고를 쓰고서 아는 피아니스트에게 보내줬는데 학부생을 무시하지 말란다. 자신도 학부생이라면서. 그도 음악성이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에 잠시 할 말을 잃어 생각을 정정할 필요가 절실히 느껴졌다.
3순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Op.18
사실 이번 공연에서 라흐 2번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았다. 최근 몇번의 공연에서 처참한 실망을 안겨줬기에 처음 보는 협연자의 라흐 2번은 그리 기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더구나 같은 작품을 수년에 걸쳐 이쯤 들으면 공연장에서 그 희열을 오롯이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공연을 가기 직전 어떤 피아니스트가 "아비람 라이케르트는 라흐를 잘 친다!” 라고 언질해주어 일말의 "그래도 혹시?" 의 마음가짐으로 들으러 갔다.
그리고 곧바로 1악장의 도입부에서부터 깨달았다. 이 연주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들겠구나.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나왔다. 템포부터가 라흐마니노프를 아는 자의 그것이었다. 아! 라흐마니노프를 몸과 마음으로 아는 자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란.
이번 라흐마니노프는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이제껏 수번의 라흐 실황과 음반을 들으며 좋아하는 템포, 선호하는 소리와 표현들이 비교적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편이다. 그래서 입맛에 맞는 연주를 듣게 되니 참으로 반갑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실황에서 이정도 역량을 뽑아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연주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살짝의 투박함이 엿보이는 그의 소리는 러시아스러운 투박함 가운데 견고한 정교함이 녹아들어갔다. 소리가 풍성하고 살아있음은 물론 공연장 전체를 휩쓸 정도로 파워풀한 면모도 겸비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생들의 연주 경력 쌓기용 연주인가 싶은 애들 소꿉장난 같은 공연들을 숱하게 보고 들아왔다. 사실 내가 볼때 정말 예외적인 몇 외의 대다수 공연들이 그러하다. 아비람의 연주는 그런 천편일률적인 연주와 명확한 선을 그음으로써 "그래, 이게 연주지!" 하는 탄성이 자아지게끔 했다. 제대로 된, 그리고 사실은 마땅히 그래야 할 "진짜 연주" 를 아낌없이 펼쳐냈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돋보였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오케스트라의 동향를 살피며 호흡을 맞추려 하는 모습이었다. 살피고 더러 눈짓하며 템포를 맞춰나가는 별것 아닌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쌓여 유기적인 연주를 엮어낸다. 그가 살아오며 차근차근 쌓아올린 연륜이 얼핏 보이는 순간이었다.
음반녹음과 실황공연의 연주력에 대하여
한편 공연을 많이, 자주 다니다 보면 깨닫게 되는 점들 중 하나는 사실 녹음된 음반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직관하는 연주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그런 자포자기를 오랜만에 뒤집어준 연주자가 오늘의 아비람 라이케르트다. 연주를 실제의 무대에서 하게 됐을 때 작품 자체의 흐름과 이야기에 집중하고 몰입하여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까지 성공적으로 해내기에는 연주자에게 큰 무리가 있다. 음반 녹음은 긴밀한 협업을 통해 그때그때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자기 페이스대로 음악을 끌고가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소리에 수렴하게끔 만들 수 있지만 실황 연주에서 그것을 해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아비람은 그것이 뛰어난 연주자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역량있는 연주자와의 첫 대면은 좌우지간 간만의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운드와 오케스트라에 관하여
롯대콘서트홀 R구역은 소리가 정말 좋다. 음향의 벽 반사가 집중되어 풍부하고 균형있는 소리가 나오고, 그래서인지 녹음된 음반과 가장 비슷한 밸런스의 사운드를 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운드의 불균형감 때문에 불편한 구석은 크게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오케스트라의 기량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간간히 음악에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구석이 계속 보였는데, 특히나 관악기 파트에서 계속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바순, 오보에, 호른, 클라리넷, 플룻, 트럼펫과 트롬본까지의 연주가 모조리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거시적으로는 악기간의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집단적 독백을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아쉬웠던 관악기군의 호흡과 프레이징
미시적으로는 관악기 연주자들의 호흡 또한 지적하고 싶다. 음악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프레이징은 호흡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음악하는 이들에게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아직도 사실 믿기 힘들지만 내 듣는 귀가 정확하다면 플룻과 호른 파트 연주자의 호흡이 영 불안정해 보였다. 분명히 프로 연주자들인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이유는 아직 모호함으로 남아있으나 이유야 어쨌든 호흡이 불안했으니 당연히 음악이 시종일관 불안한 흐름으로 절룩거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떠한 공연을 가서 솔리스트도 아닌 오케스트라가 큰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목격할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조용히 품어 보았다.
템포 또한 미세하게 엇나가며 소리의 부족함을 보완해줄 만큼의 긍정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심기를 가장 크게 건드렸다. 완벽한 엇박이면 시원하게 포기라도 할 수 있다. 미세하게 엇나가면 숨을 반박자씩 느리게 쉬는 듯한 기분이다. 숨은 쉬어지지만 영 갑갑하고 불안하다는 말이다. 찝찝한 기다림은 공연이 끝날때까지 내내 계속된다.)
현악기 군집은 평탄하다 못해 아주 훌륭했다. 이상하리만치 관악기가 문제였다.
개선이 시급한 문제처럼 보인다. 비전공자가 전공자 면전에 대고 말하기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연습을 더 하던가,
연주의 문제점을 찾든가, 해야 할 것 같다.
맺으며
그래도 라흐 2번을 할때는 신기하리만큼 다시 조화와 균형을 찾아 너무나 마음에 드는 연주를 선사했다. 협연자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도 아울러 내린 평가다. 라흐 2번이 시작함과 동시에 없던 노련함이 일시에 나타나더니, 썩 괜찮은 연주가 나왔다. 2악장에서 프렌치 호른도 원하는 질감의 소리를 내주었고, 피날레 또한 매우 깔끔했다. 개인적으로 2악장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내가 기대했던 표현과는 다른, 조금 더 담담한 연주가 나와서 당황스럽긴 했으나 나름의 일리가 있었고 고개를 기꺼이 주억거릴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즐거웠다.
대충 흘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 (여담)
앞서 흥미롭다는 말의 의미는 비단 음악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중간에 피아노 교체 시간 도중 누군가 마스께라를 백번 활용한 벨칸토 창법으로 우렁찬 재채기를 선보여 롯데콘서트홀의 탁월한 음향 설계를 효과적으로 증명시켜줬다. 사방팔방으로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청중 모두가 (몇 명인지 가늠도 안된다) 웃음이 터져버렸고 그런 불미스런 사건에 대체로 엄격한 나마저도 뒤늦게 슬며시 웃음을 띄게 했다.
자, 이제 조금 더 심각한 문제. 나는 악장간 박수를 치는 것에 대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해외에서는 실제로 악장 간 박수를 치는 사례도 적지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안치는 것이 일반적이고, 나 또한 그것을 권장하기는 한다.
이유인즉슨,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한 상태에서 특정 악장에 깊이 감회되어 연주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때 박수를 치게 되는데, 작품을 모르는 상태로 그런 짓을 해버리면 아주 얇아져있는 유릿장같은 감정선을 자신도 모르는새에 박살낼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악장 간 박수는 금물" 이라는 통용되는 에티켓이 정립된 것이다. 어찌됐든 장송행진곡이 나오는데 개다리춤을 출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호응도 호응 나름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상황이다.
어쨌든 요점은, 이번 공연에서처럼 마냥 즐겁다해서 모르는 작품의 악장 사이에 괜한 박수를 유도하려 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무식한거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지 모르나 다음번에는 누군가에게 암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디, 부디 유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