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트홀 연세 백양누리, 이진상 리사이틀
Bravissimo !!
금호아트홀에서 이루어진 이진상의 오늘 연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흐와 리스트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이번 공연에는 대중적인 성격의 작품들과 적절히 무게감 있는 성격의 작품들이 아주 균형감 있게 녹아들어가 있었다.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는 마흔의 그는 아주 섬세하고도 소리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꾹꾹 눌러담은 소리를 보여주었다.
섬세하지만 중후한.
무거운 소리에서 깃털같은 음악적 서사를 보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 아닐까.
바흐-헤스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 되시니"
BWV147
1723년 바흐가 작곡한 칸타타에 등장하는 코랄이다.
영국의 피아니스트 마이러 헤스Myra Hess 가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편곡한 이 곡은 성부간의 조화가 참으로 인상적인데, 특히나 이진상의 연주는 2성부에서 3성부로 어우러지며 그런 방식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트에서 화성들이 개별적으로 정말 잘 들렸다. 마치 피아노라는 한 악기의 소리를 넘어서 다성부로 합창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상이었다.
바흐-켐프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BWV645
"오르간을 위한 코랄 전주곡" 이다. 바로크와 전고전 시대에 흔히 그랬듯 후에 그의 이후 칸타타에서도 이 선율이 차용된다. 이것을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편곡한 위대한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 Wilhelm Kempff (여담이지만 나는 켐프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정말 좋아한다!) 는 해당 작품에서 레가토 주법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고 한다.
Wachet auf, ruft die stimme 는 흔히 부조니의 arrangement 로 많이 연주되곤 하는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부조니의 편곡과는 많이 다른 켐프의 버전이 연주되었다. (부조니 버전의 편곡을 연주한)백건우나 박재홍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아니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연주였다. 단정적이고 단호한.. 덜 따뜻하지만 어쩌면 더 절박한 지극히 종교적인 연주. 대단히 격정적인 터치와 끝에 이르러서는 울부짖는 듯한 일종의 절실한 기도를 연상케 하는 감정의 휘두름을 보았다.
바흐-부조니 "샤콘느"
BWV1004
샤콘느는 부조니의 역작이다. 바흐를 평생 연구한 그가 후대 음악가들에게 선물한 시대적인 Legacy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의 샤콘느는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으로 쏠린 관성의 힘을 따라 그저 끝만 바라보고 달려 숨쉴 틈이 없었다. 이진상은 건반을 때리는 힘이 대단한 피아니스트처럼 보였는데, 이것이 그저 강한 타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안에 내재된 감정을 끌어모아 건반 소리에 담을 수 있는 능력까지 나아갔기에 놀라웠다. 또한 그 소리에 매우 깊이 공감되었다. 샤콘느는 주제 주변으로 변주가 일어나며 일종의 반복이 계속되는데 이 때문에 중간에 살짝 지루해질 위험이 있으나 이번에는 그럴 겨를이 전혀 없었다. 엄청나게 몰아치는. 대단한 파워. 그것을 가장 여실히 느낀 파트였다.
슈베르트-리스트
"셰익스피어의 세레나데, D.889",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 D.911/5",
"송어, D.550"
서정적이고 사랑스러웠다.
인터미션 이후의 리스트가 편곡한 가곡 위주 작품들은 그러했다. 분위기가 환기되어 쉽게 지치는 귀에도 잘 들어올 수 있었으리라.
그 중 "송어Die forelle"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독일 가곡이다. 소위 "세탁기가 빨래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노래"로 더 잘 알려져있는 이 곡은 청중에게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익숙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름답고 익숙하지만 적절히 무겁고, 연주에 있어서 작품성 있는 곡이어서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In einem bächlein helle, da schoß in froher eil" 평화로운 강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 첫 소절이 이진상의 물흐르는 듯한 연주에 얹혀 머릿속에 여운을 남겼다.
한편 피아노를 위한 곡과 가곡이 피아노 곡으로 편곡된 곡의 소리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 또한 이진상의 연주에서 높이 사고 싶은 부분이다. 함께한 동행 또한 이것을 알아차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터미션 이후의 연주는 말 그대로 "노래를 불렀다".
구노-리스트 "파우스트 왈츠"
S.407
샤를 구노의 잘 알려진 오페라 "파우스트"의 1막 피날레에서 나오는 왈츠를 리스트가 가져와 편곡한 작품이다.
이 왈츠를 처음 들었을 때 저돌적인 분위기에 매혹됐었다. 3박자의 왈츠지만 춤을 추듯 부드럽게 흘러간다기보다는 놀랄 만큼 노골적인 분위기와 첫 박이 가진 불균형적인 힘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승리와 도취적 매력에 가득 찬 연주였다. 다이내믹이 굉장히 잘 느껴졌는데 마지막 격정에 도달해서는 나와야 할 소리의 최대치를 정확히 찍었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무척 편안해졌다. 부족하지도 않았고 넘치지도 않았던 연주였다.
리스트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이름과는 달리 사실 바흐의 음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리스트의 이 작품은 바흐(BACH) 를 이루는 알파벳에 대응되는 음들로 구성된 주제를 가진다.
이진상은 여기서 비애와 우울을 비롯한 몇가지 감정들이 극히 상반되며 서로 부각되어 구분되는 놀라운 감정 컨트롤을 풀어나갔다. 고성과 침묵을 오가는 대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앵콜 :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파우스트 왈츠와 더불어 짝을 맞춘 영리한 편성이었다. 앵콜곡의 첫 음을 듣고 감격해버렸다.
그러나 연주적인 측면에서는 악마가 주인공이고 파우스트의 사랑을 표현하는 구간조차 그가 악마에게 홀려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개인적으로 조금 더 드라이Dry 하고, 냉소적이고, 사악하고, 은근하고, 비열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이 왈츠에서는 터치들이 대개 온정적이었는데, 그럼에도 개인적인 해석의 차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 안에 충분히 들어서 있었다. 사실 애초에 편성의 재치 덕에 감격스러운 상태였기에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맺으며
곡들의 편성부터-작품 사이의 개연성의 측면에서-엄청난 힘과 디테일의 연주까지, 영혼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연주였다.
정말이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