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일파워 임승희 Jul 10. 2020

엄마의 옷장

여섯 번째 이야기.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이 멈춰버린 2020년 코로나 19로 일상에 제동이 걸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나만 이렇게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걸까? 하는 고민을 한다. 겉으로 보이기엔 다들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스크 시대라는 사소한 불편함만을 갖고 사는 것처럼 보여진다.

사람들 속으로 숨고만 싶어 진다.

작년에 가르치던 아이들이 실습을 위해서 서울에 면접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떠난 학교에 그래도 이번학기 남아서 돌봐주던 나와 박사 동기 지교수랑 같이 만나기로 하였다. 심장이 뛴다. 멈춰버린 나의 일상에 몇 분간의 혈액이 도는 느낌을 받는다.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10살 아들은 질문을 한다.

"엄마 외출해?"

"응 대학생 언니 오빠가 서울에 온다고 해서 만나기로 했어!"

"엄마 코로나 걸려~~ 거기 언니들 만나면 코로나 걸린다고 뉴스에 나온 거 몰라? 코로나 걸리면 많이 아프데~~"

아들은 엄마가 다시 지방대학에 간다 할까 봐 미리 방패 망을 치고 있다.

나는 올초까지 대구권 지방대 교수로 재직하였었다.

대학교수가 되고 사람들은 노후준비 완료되었다고 하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지금의 나의 모든 것과 교수라는 직업과 맞바꿈 하게 된 것이었다.

필드를 베이스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 많은 에너지와 즐거움을 주었었다. 에고 집단인 교수사회에서도 나는 나름 지역색 강한 경남에서 잘 버텼다.

문제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로움과 아들과 먼 거리를 두고 겨우 며칠 케어해야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교수라는 직업은 그런 나의 외로움보다는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중년에 처음 만나는 외로움을 나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시선은 아주 싸늘했다. 



엄마의 옷장을 열어본다. 


나의 10번째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세대에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엄마는 조용히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셨다. 그리고 바나나 한 개 껍질을 벗겨 입에 넣어주며 어여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몰랐다. 그날이 내 생일 인 줄은. 엄마가 나만을 바라보며 햇살 아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의 넓은 카라의 블라우스가 그날따라 여성스럽게 느껴졌다. 

엄마의 블라우스를 입어본다. 엄마의 냄새가 코끝으로 살포시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출처:그라폴리오

방학 실습을 위해 서울에 면접을 온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나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업체를 연결해준 교수 말과 면접관 말이 틀려서 나름 속상한 상태였다. 여차하면 눈물을 쏟을 태세였다. 차가운 오렌지나 병을 따서 컵에 따라 아이들에게 주었다.

눈빛으로 이미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다.

우리는 심금을 울릴 포인트를 애써 피해 가면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나는 안다.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한 학기를 보내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를. 그러나 나는 애써 외면한다.


"잘 될 거야. 지금은 커뮤니케이션에 오류가 있긴 하지만, 지금 내가 너희를 보니깐 잘 될 것 같아"


아이들은 나의 보호막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곧 사회인으로 나가야 하는데 나의 보호막은 유해가 될 수 있어서 나를 지그시 눌러본다. 나의 웃고 있는 얼굴 안에 깊은 슬픔을 아이들은 케치 하였을까?

소고기국밥을 같이 먹으며, 사회라는 곳에서 힘들 때 언제든지 연락하면 내가 힘이 되어준다고 마무리를 하고 서울역으로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작업실에서 멈춰버린 시간을 어떻게 하든 살려보려고 고분분투 중이다. 나는 딴따라로 25년을 살아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연예인이나 따라다니는 시다 정도로 보였던 나의 직업 스타일리스트. 지금은 스타일리스트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스타테이너들의 활약으로 시선이 사뭇 고와졌다.

그래도 나는 현장을 누비며, 촬영 현장에서 살던 그 시절의 딴따라가 좋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는 멈춰버렸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던 나에게 갑자기 엔진 과부하가 걸린 걸까? 

누구도 나의 지금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나는 모든 걸 누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많이 외롭고 무섭다.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다. 





지교수와 지인이 알려준 철학관에 갔다.


서로 막막한 미래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었다. 과연 나의 인생은 어떤 모양으로 생겼을까? 

지교수는 유복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케어 아래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디자이너 실장으로 오랜 시간 재직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석사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박사과정의 동행자로 나를 만났다. 박사논문 스터디 때 지교수의 엄마는 가끔 자수가 들어간 손수건에 작은 도시락을 싸주셨다. 입이 짧은 지교수만을 위한 김밥 6개와 유부초밥 2개 그리고 삶은 고구마 등등. 내 딸이니깐 내가 너무 잘 아니깐. 


역시나 지교수의 인생은 부유한 태어난 모습 그대로 완만하였다.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딸이니깐 내가 너무 잘 아니깐. 


엄마가 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옷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