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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미 Mar 20. 2023

6학년 교실에서 일년살기 1.

2008년의 기록을 시작하며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받은 2월의 어느 날,양복을 차려입으신 아버지는 옆자리에 나를 태워 구불구불한 산과 강을 따라 발령받은 학교에 첫인사를 함께 가주셨다. 평소 커피를 드시면 잠을 못 주무시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과 마주한 자리에서 묻지 않고 내주신 커피 한잔을 다 드셨다. 그리고 그 날 한 숨도 못 주무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으셨던 게 나의 초등교사 발령이었다고 하셨으니 그 날의 설레임은 아버지와 내가 같을 것 같다.      


2000년 3월, 왼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산줄기가 달려가는 작은 학교에서 처음 초등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 앞에 섰지만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은 미성숙한 인간으로서 선배교직원들․아이들과 맞닥뜨린 1년간의 온갖 갈등과 혼란, 실수와 어리석음이다.      


이후 20여년은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기 위해 발버둥쳐온 시간이다. 언제나 성숙한 태도로 어른으로서의 따뜻함, 일관된 모습이 신뢰를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언제나 좌절하고 다음날을 다짐하는 미완성의 교사였다. 그리고 지금도 일과중에는 저 아래에서 가라앉아 있던 후회와 반성, 유치함과 부끄러움이 잠자리에 누우면 수면위로 올라와 괴롭힌다.     

 

‘6학년 교실에서의 일년살기’를 정리해보니 너무도 하찮은 내용이라 부끄럽다. 다른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교육과정에 비하면 우스울 뿐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배움이 있었을지, 아이들에게 어떤 선생님으로 남았을지 자신할 수도 없다. 수없이 많은 대한민국의 교사 증 한 명으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테고, 누구나 그러하듯 초등학교 시절의 안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반짝이던 열정과 시도, 아이들 한명한명 눈맞춤하고 칭찬의 말을 건네자 다짐했던 매일의 아침, 학급운영과 수업을 머릿속으로 미리 시뮬레이션하던 순간순간의 내 모습과 다짐이 아직 생생하다. 



2008년, 전근을 가게 된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인 지역중심지의 큰규모 초등학교에 6학년 담임교사로 시작하게 되었다. 매년 새롭게 주어지는 역할과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허덕이던 교사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학급운영과 교육과정을 조금씩 찾아보고 시도해보던 시기였다.      


선배 교사들의 모습에서, 방학마다 찾아다니던 연수에서, 책을 읽고 배우면서 조금씩 시도해보았던 학급운영과 교과지도의 내용들을 나만의 교육과정으로 정리해봐야겠다는 용기였다. 책과 연수에서 많은 울림을 주셨던 선배들의 교육과정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이었다. 인터넷에 방대한 자료를 공유해주시는 멋진 선생님들의 자료를 받아 활용하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학교로의 전근은 뭔가를 새롭게 시도해 볼 용기를 주었다.      


2008년 새학교에 적응하는 일년이 지나고 2009년부터 6학년 교실에서의 일년을 기록으로 남겨보았다.


 2021년까지 매년 양식과 내용은 바뀌었고 교육철학이나 이론은 없다. 다만 나에게 맞춤한, 나만의 교육과정과 학급운영을 담아 정리해왔을 뿐이다. 하찮고 하찮은 6학년 교실에서 일년살기 기록이다.     


시작은 월별로 주제를 정하는 것이었다. 매월의 주제는 9년의 경력과 아이들과의 생활, 선배교사들로부터의 배움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나와 우리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나와 우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일년을 마무리하는 흐름은 어떤 만남과 관계에서도 동일한 것 같다.      


다음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양과 질, 기록의 범위를 정해야 했다. 아이들과 경계를 만들고 내용을 채워 가는 일은 교사가 ‘힘들다’는 이유로 중간에 그만둬서도 교사가 ‘해야한다’고 중간에 끼워넣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꼭 끝까지 할 수 있는 만큼만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 조금만, 최대한 간단한 형식으로 시작하게 되었니다. 처음부터 비어있는 여유가 있어야 학교에서 생기는 것들,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웃으면서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형식은 그냥 아무 양식없는, 세부계획없는 한글파일일 뿐이다. 부끄럽지만 이 기록을 보면 누구나 두려움없이 ‘나도 이정도 시작은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3월 2일 개학을 앞둔 시기, 학년․학급교육과정 계획과는 별도로 월별 주제만 정하고 주요활동과 운영할 교과를 단순하게 나열해두었다. 이후 주 또는 월별로 조금씩 학년․학급교육과정의 흐름을 고려하여 세부계획을 구상하여 추가했고, 매일 아이들이 하교한 후 하루를 돌아보며 기록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가끔 기록이 누락될 때도 있었고 다음날이나 며칠이 지나 한꺼번에 정리할 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 내용이 부실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목표는 일년동안 포기하지 않고 해보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하찮은 내용에 대한 긴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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