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이 넘도록 팔로우를 하고 있는 이 남자는 고독으로 가득 찬 호수에서 여유로운 유영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지독하게 고독하지만 한 번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처럼, 고독의 호수에 푹 잠겨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어떻게 저렇게 유연할 수 있지?
그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였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유명인이기도 했다. 나는 어린 남자도 유명인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독한 남자의 글을 보는 건 좋았다. 그의 글 속에는 명료한 사유와 아름다운 감성이 공존하고 있어서 마치 에릭사티의 <짐노페디>를 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관음증에 걸린 여자처럼 남자의 글을 염탐했다. 그리고, 남자의 글을 염탐할수록 그리움의 감정이 점점 깊어졌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이 그리워 밤잠을 설치던 어느 날 남자에게 DM이 왔다.
“안녕하세요? 늘 서로의 글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야 인사를 청하네요.”
나는 욕조에 있다가 서둘러 타월을 걸치고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심호흡을 했고,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하네요.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글을 쓰기 위한 감성에 몰두하는 걸 좋아하는지 늘 궁금했어요.”
횡설수설 두서없이 쓴 답변 뒤에 침묵보다 길었던 10분이 흘렀다. 왜 답이 없지? 잠이 들었나?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순간, 머리 위에 떠 있는 말풍선 속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타이핑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답변을 보냈다.
“글을 좋아한다기보단, 그냥 가끔 만나는 틈새에 느낌이 오면 써요.”
나는 여전히 말을 고르느라 분주했고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가 한 번 더 타이핑을 했다.
“중요한 건 내 속에 당신에 대한 엄청난 궁금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궁금해요. 얘기하고 싶어요.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오늘 밤을 너머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요.”
그렇게 알게 된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보러 왔다. 아무리 바쁜 스케줄이 있어도 약속한 날을 어겨본 적이 없고, 약속하지 않은 날에 불쑥 찾아오는 무례도 없었다.
나는 남자가 없는 5일 동안 그를 기다리면서 손톱을 다듬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왼손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그리고 남자가 오면 나머지 오른손으로 남자의 왼손을 꼭 잡고 밥을 먹었다.
우리는 가끔 와인을 마셨고 매번 밤을 새워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내게 피아노를 쳐주었고 노래를 불러줬다. 서로 떨어져 있는 밤마다 영상통화를 하며 잠이 들었고, 잠든 남자의 얼굴이 비치는 모니터를 어루만지며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회색빛이었던 세상이 온통 컬러풀하게 채색되었다.
그렇게 1년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남자가 말했다.
“우리 정말 완벽하지 않아? 지금까지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 내게 당신은 정말 완벽해.”
내가 봐도 우리는 정말 완벽하고, 완전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이 있던가? 하지만, 내생에서 가장 높은 행복의 정점에 올라갔던 그날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년 동안을 그와 이별한 집 소파에 앉아 이별하던 그 장면을 더디게 응시하며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 한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를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잦아지고 그렇게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상대가 알 길이 없으니 나 혼자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그러는 사이 내 영혼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나를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없는 우리’는 성립될 수 없었다.
나는 그 아픈 연애를 통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선 어떤 행운을 만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지나쳐가는 수많은 인연들은 다음 사람에게 연결되기 위한 계단의 역할로 찾아온다는 비밀도 함께 알게 되었다.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지만 인생 전체를 볼 때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과정인 것이다.
또한, 계단의 끝에서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모든 난관을 지난 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상위에 있는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나’를 찾게 되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스스로 반짝이는 것은 누구라도 탐나기 마련이니까.
이별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네 사랑은 그 시간을 충실히 살아냈고 내 사랑은 백억 년 전에 출발하여 겨우 이제야 닿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