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 않은 건 행복인가.

by 러브로라

슬프지 않은 건 행복인가.

망가진 컨베이어 벨트를 도는 여행 가방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슬픔이 멈췄다.


어느 겨울, 나는 동생과 함께 연고도 없는 춘천에 와인바를 차렸어. 호수처럼 잔잔하여 맑게 갠 날은 마치 하늘의 거울만 같은 소양강을 보며 한눈에 반해버렸거든.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우리 자매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미친 듯이 싸웠던 것 같아. 잘하고 싶은 마음의 질량은 같은데 잘하고 싶은 마음 하나만 앞서 서로의 운영방식을 비판하고 날을 세웠어. 그동안 동생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알았지, 뭘 싫어하는지 무엇이 두려운지 아무것도 몰랐으니 당연한 패배였던 거야. 긴 전쟁 끝에 나는 몰락한 왕처럼 춘천을 떠나 제주로 갔고 그곳에서 더욱 시린 슬픔을 만나게 돼. 제주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처음엔 가끔 웃기도 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곳에서 또 다른 분쟁이 시작되고 결국 난 쫓기듯 그곳을 나왔어. 꼬인 매듭은 바로 내 마음 안에 있었던거야.



원래 제주에 이렇게 눈이 많이 왔었나? 유난히 굵은 함박눈이 나리는 날 겨울 외투도 없이 집을 구하러 나왔는데, 서귀포 남원에는 아직도 아궁이가 있는 집이 있더라. 화장실을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되는 옛날 집 있잖아.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어. 꿈인가?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그런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곳에 정말 꿈속의 풍경인 듯 귤나무 밭이 펼쳐져 있는 거야. 주홍빛으로 영근 귤나무 위로 하얗게 함박눈이 쏟아져 나리는 풍경을 보며 슬픔 속에도 꽃이 피는 걸 알고는 눈물이 났어. 이 풍경을 보려고 집도 없이 쫓겨났던 거구나.


나는 겨우 얻은 삼양의 방에 모로 누워 부서진 것들을 회복해갔어. 화물선에 실려오느라 부서진 나보다 더 부서진 나무 책장의 삐걱대는 소리만 남은 고요한 방에서 두 달이 넘도록 말도 없이. 그렇게 있다 보니 거기가 춘천인지 제주인지 분간이 안 가는 거야. 커튼을 열면 그곳은 제주였고 다시 커튼을 닫으면 그곳은 춘천이었어. 내가 바라던 이상을 찾으려고 돈 30만 원만 모이면 그렇게 여행을 다녔는데 여기가 나의 이상이었구나. 어느 장소 혹은 어느 시점에 위치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라도 그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단 걸 알게 된 거야.


이렇게 꾸역꾸역 슬픔으로 생을 배운 나는 어쩐지 슬프지 않은 날이 속옷을 입지 않은 날처럼 낯설어. 내게 슬픔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않는 백야처럼 낮에도 밤에도 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내게 슬픔이 없는 건 행복이 아니야. 슬픔이 없는 건 그냥 그대로 슬픔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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