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3-40
그만두기로 맘을 먹고, 운영위원회에 보내는 양해의 말을 A4용지 반 장 정도 작성했다.
운영위원분들께 죄송한 말씀과 양해, 부탁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12월 7일, 저는 공간 분리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8일 샘플3이 본인의 퇴사를 통보하셨습니다.
저는 이 일을 좋아했고, 계속하고 싶었고, 제가 그만 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분리를 통해 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반증으로 지금도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사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더 이상의 2차 가해를 참고 견딜 수 없고, 제가 버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운영위원님들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고용과 관련되어서는 ‘퇴직’으로 처리하고 1년가량 실제로는 ‘휴직’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조직에 대한 애정은 있기에 지금 당장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내부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퇴직 여부를 결정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신다면 3월까지 업무를 마무리 짓고 퇴직하겠습니다. 다만, 조직 덕분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활동들이 2021년에 마무리가 될 예정이기에 이 활동만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표의 만행이 있던 다음 날, 양해의 말을 작성했다. 그리고 동료와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동료는 계속해서 말렸다. 왜 샘플3이 아니라 내가 그만두느냐고, 그건 그들이 바라는 일일 뿐이라면서 말렸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 나를 괴롭게 하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회의 당일이 되었다. 동료는 출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계속 전화를 했다. 큰 행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좀 더 생각하고 그만두는 걸 이야기하자고 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30분 전까지도 고민을 했다. 그리고 동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내가 성급하게 결정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한 템포 늦추기로 했다. 행사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는 않다.
원래 퇴직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때는 회의 시작 전에 샘플3과 대표에게 "오늘 회의 말미에 퇴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회의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미루기로 했으니 이야기를 따로 하지는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빠진 예산만 설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회의는 빨리 끝났다. 샘플3은 결국 예산 작성 바로 직전까지도 언제까지 일하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만두는 날짜를 기준으로 예산을 세웠다. 그래서 예산을 설명할 때도 나와 동료가 일하는 활동비라고 표현하지 않고 누가 되든 2명이 일하는 활동비라고 설명했다.
예산 설명이 끝나고 회의가 종료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표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샘플3이 그만두기로 이야기했습니다. 김토로가 샘플3만큼 제대로 일할 수 있는지 신뢰할 수 없으니 바로 직급을 올리지 않고 대행으로 하려 합니다. 한 달이 되든 1년이 되든 운영위원님들이 요청하면 그때 직급을 올리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회의를 시작하기 20분 전에 사무실에 와 있었고, 나에게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나도 바로 직급을 올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대표에게 "나는 직급이 올라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대표님께서 다른 분을 데리고 온다면 저는 그분을 모실 생각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표는 수많은 단어들을 놔두고 본인을 앞에 두고 '신뢰할 수 없다'는 표현을 썼다.
만날 때마다 소통하라고 말하던 대표가 나와는 소통하지 않았다. 입 다물라는 소리를 빙빙 돌려하던 대표였기에 나는 그의 저 말 역시 입 다물라는 소리로 들렸다. 입 다물지 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너에게 권한을 주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더 황당한 것은 대표가 저 말을 하는 중에도 샘플3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다. 샘플3과 대표는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다. 피해자의 거취를 가해자와 논의해서 결정한 것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했던 것일까.
마음속 서랍에 넣어 놓았던 퇴직을 꺼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회의를 끝내려는 대표의 말 뒤에 "저도 할 얘기가 있습니다." 하고 적어 놓았던 양해의 말을 화면에 띄웠다. 대표와 샘플3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내렸다. 한 운영위원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냐고 해서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우선은 운영위원들도 즉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 또한 급작스러웠기에 회의를 종료했다. 대면으로 한 회의가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회의 종료를 누르자마자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대표가 점잖은 척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그거 봐, 내가 조직 와해된다고 했지! 왜! 언론에 제보라도 하지 그래!"
'정말 그래도 돼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입술이 달싹거렸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한 대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편으로 따지면 성인 남성 2명 대 여성 1명이었다.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샘플3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나가는 샘플3에게 내가 그만둘 테니 일을 이 조직에서 계속 일 하라고 말했다. 샘플3은 나중에 얘기하자면서 나가버렸다.
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을 저지른 것은 과연 나였을까? 아님 그들이었을까?
나는 말을 뱉는 순간에도 그들이 물리적으로 제지하면 어떻게 하나, 혹시 더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했지만 그들은 말을 뱉으면서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나를 탓하고 질책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가벼웠다. 진작에 그만둔다고 할 걸.
그동안 마음고생했던 내게 미안했다. 미안했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