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토로 May 28. 2021

화이트보드

샘플 3-41

업무 특성상 각자의 일정은 각자 해소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면 내부 회의 때 이야기했다. 고정되어 있는 일정은 다들 알고 있었다. 


샘플3이 나보다 훨씬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외부 업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말은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많아졌다고 해도 온종일 비우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그런데 샘플3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샘플3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고정 회의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날이 되든 당일이 되든 미리 이야기를 했다. 최대한 미리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까먹은 날에는 아침에 급히 나가면서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샘플3은 동료의 일정도 매번 내게 물었다. "왜 안 오시지?", "오늘 교육이라고 얘기하셨나?" 등이었다. 다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이지만 샘플3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일정과 관련해서 일을 두 번 세 번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리 얘기하고, 잊어서 또 얘기하고, 내부 회의할 때 한 번 더 이야기해 주고... 반복되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이트보드였다.

사무실에는 여태껏 공유 일정표가 없었다. 그래서 핑계 김에 달력 화이트보드를 구매했다. 각자의 일정을 화이트보드에 정리했다. 동료는 화이트보드를 사용하니 교육일정이 한눈에 들어와서 좋다며 진작 쓸걸 그랬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내 일정을 오픈하고 정리하니 맘이 편했다.

하지만 샘플3은 아니었다. 화이트보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일정을 물어서 화이트보드에 써 놓아야 일정이 공개되는 것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보드마카를 손에 든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일정을 공유하느냐?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사무실에 오지 않으면 외부 일정이 있으려니 했다. 대신 업무 일정을 정리해야 하니 돌아온 뒤 물어봤다.


샘플3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일정을 보지도 않고 꼭 다시 되물었다. 심지어 말이 된 것도 그랬다. 결국 우리는 불만을 표출했다. 화이트보드를 봐 달라, 각자의 일정이 바쁠 때는 그럴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화이트보드 싫어합니다."


그랬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동안 그래 왔는데, 매번 잊어놓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일의 효율은 샘플3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기분에 맞춰서 일을 하고 있는 리더였다.




어느 날은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 샘플3이 밖에서 내가 자신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다닌다며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오신 분은 내게 보고도 하지 않느냐며 물으셨다. 그 간의 일들을 쭉 말씀드렸더니 "어휴, 니가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니."라고 하시며 그래도 일정 보고 따로 해주라고 하셨다. 대체 외부에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건지...


통화 이후에 매주를 시작하면서 그 주의 일정을 종이에 적어서 샘플3의 책상 위에 올려뒀다. 그 일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화이트보드에 쓰여 있는 일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개미 목소리로 일정을 써 줘서 고맙다고 했다. 고맙다고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10명, 20명도 아니고 3명이 일하는 곳에서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그렇게 일정을 보고해야 하는 것을 왜 '나만' 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리더니까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을까? 동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무슨 기준이었을까?


온라인 같은 새로운 방식에는 치를 떨어서 이제는 고대 유물 같은 화이트보드를 사용했음에도 상급자에게 보고도 하지 않는 나쁜 후임이 되어버렸다. 비단 화이트보드뿐이었을까. 갈등이나 불합리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식은 대부분 샘플3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작용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샘플3이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사무실에서 말을 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소통을 멈췄다.

샘플3은 대체 왜 자신이 소통에 능하고, 상황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 동료처럼 포기해서 그런 것을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뢰할 수가 없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