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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r 14. 2021

수습

샘플 3-3

새벽같이 온 문자에는 본인이 한 달 동안 책상을 빼겠다고 했다. 잘못은 본인이 저지르고 도망가는 꼴이라니 그만큼 화나는 게 없었다. 말로만 책임진다고 한 거지 수습은 나에게 맡기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도망가지 말라는 나의 말에 한 달 동안 책상을 빼겠다는 말은 그만두겠다는 말로 바뀌었다. 나는 샘플3을 붙잡았다(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정리도 없이 이런 식으로 그만두면 내가 더 곤란해질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만두는 게 최선이냐고 물었더니 그 와중에도 '안 그만두면 나는 너를 더 봐서 좋지' 같은 말을 내뱉는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이, 그만둔다는 말이, 책임지겠다는 말이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발언을 했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보여줬는데... 뭘 더 보여줄 게 있을 거고 제 말에 힘이 실릴까요? 그치요?"

이 말은 '너 이제 내 말 더 안 들을 거잖아'와 같은 말이었다.

자꾸 나한테 본인이 그만두는 것에 대한 결정을 하라고 하길래,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고 했다. 그는 그만두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침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왜 그만두냐고 말이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갱년기인가 보다고, 술 마시고 그런 것 같다고.

그런데 돌아서 생각해보니 잘못하면 뒤집어쓸 것 같았다. 혹시 극단적이 일이 생길까 봐 어르고 달랜 부분도 있지만 이런 말들과 일들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부적절한 관계였다가 틀어진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 분에게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돌아온 질문도 비슷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샘플3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터치를 하지 않았고(그러기 전에 도망 나왔고) 그가 그만두면 지금 상황을 내가 수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로서는 샘플3에게 배울 것도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겠는지 모르겠고, 나는 샘플3을 믿고 지역을 옮겨가면서 이쪽으로 왔는데 이제는 누구를 믿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도 말했다. 이상한 오해가 발생했을 때 그녀가 나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방어막 하나를 세웠다.


나는 샘플3에게 우울증 등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그는 이후에 자신의 마음이 좀 정리되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 말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이성적인 판단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순간적인 결정이 아닌 숙고한 뒤 나오는 결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그만두는 방향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러나 샘플3은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갔고, 점점 같이 일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그럼에도 나는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지내왔다. 내가 그만둘 이유는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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